인공지능(AI)의 산업 재편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법률·금융·의료 등 사회의 각 전문 직군(職群)에 벌써 깊숙하게 침투해 있다. AI 변호사와 판사, 챗봇과 로보어드바이저, 폐·유방·안과 질환 영상 데이터 판독 AI 닥터가 법정과 은행 창구, 병원 등 최전선 현장에서 이미 활약하고 있다.
법률 분야만 봐도 2019년 8월 서울에서 한국인공지능법학회와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 공동 주최로 열린 ‘제1회 법률 인공지능 콘퍼런스’1를 통해 AI 변호사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알파고’의 법률 버전인 ‘알파로’는 이날 인간 변호사로만 이뤄진 9개 팀을 물리치고 1~3위 우승을 차지했다. 변호사 또는 일반인과 법률 AI가 협업한 혼합 팀은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심사위원단이 기대하던 근로계약서의 법률 쟁점 분석과 권고 사항 진단을 내놓아 참석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알파로는 아직 계약서 사전 분석 기능에 집중하고 있지만 향후 특허 등 지식재산권 분쟁, 인수 합병(M&A) 같은 기업법 분야의 송무(訟務) 업무까지 빠르게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도 판사의 판결문 초고(草稿)를 대신 써주는 지능형 판결문 생성 시스템 도입을 수년 전부터 준비 중이다. 미국 등 법률 AI 선진국에서는 재범 가능성을 판단하는 가석방 결정, 재판 결과와 심지어 입법 통과 여부를 예상하는 상용화 AI 서비스가 사법 시스템 내에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있다. 중국도 온라인 쇼핑의 하자(瑕疵) 분쟁 등 디지털 쟁송(爭訟)에 특화된 세 곳의 인터넷 법원에서 검은색 법복을 입은 형상의 AI 판사가 인간 원고, 피고와 합성 음성으로 문답을 나누며 재판의 상당 부분을 진행하는 장면을 외신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유럽의 IT 강국 에스토니아는 일정 금액 이하의 소액 민사재판을 AI 판사에게 전담시키고, 판결에 불복하는 당사자만 인간 판사에게 항소하도록 해놓았다.
금융 산업 역시 오프라인 지점의 창구 텔러(teller)나 콜센터에서 하던 상품 설명과 가입 안내 등을 AI의 탁월한 자연어 처리(NLP) 기능을 장착한 챗봇에 맡긴 지 오래다. 펀드 등 금융 상품 운용에서 인간 매니저보다 안정된 투자수익률을 기록한 은행과 증권사, 투자회사의 로보어드바이저는 경제 신문의 헤드라인에 단골로 등장하고 있다. 의료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인공지능 의사로 불리는 IBM 왓슨(Watson)은 우리나라의 10여 개 병원뿐 아니라 전 세계 수십 개국의 수백 개 병원에서 암 정복과 정밀 의료 진단에 쓰이고 있다. 이를 모방한 한국형 인공지능 의사 닥터 앤서(Dr. Answer)도 개발 3년 만에 서울아산병원 등 11개 병원에서 치매 등 3대 중증 질환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의사들과 힘을 합치고 있다.
현재 이들 인공지능 전문가의 특징은 인간을 돕는 조수 역할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인간을 직장에서 쫓아내는 대체(substitute)가 아니라 한껏 양보해도 협업(collaboration) 수준에 그친다. 물론 앞으로 인공지능의 침투가 더 진전되면 실업 문제도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등장과 인간 일자리의 대체, 다시 말해 ‘AI 실업’ 이슈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변화의 양상에만 초점을 맞춰보자.
산업화 시대의 제조업과 전통 서비스업, 즉 기존 아날로그 산업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하면 흔히 ‘~테크(tech)’로 불리는 새로운 융합 산업이 탄생한다. 법률은 리걸테크, 금융은 핀테크, 의료는 메디테크로 바뀌는 식이다. 여기까지는 단순한 IT화에 불과하다. 더 쉽게 말해 인간의 피와 살, 기계의 딱딱한 볼트와 너트가 있던 공간에 반도체 칩을 내장한 계산 기계가 투입되는 것이다. 초기엔 전산화로 불렸다. 주로 방대한 양의 통계를 계산하는 작업에 컴퓨터가 쓰였기 때문이다. 이후 컴퓨터끼리 서로 연결되는 네트워크 기술을 통해 정보화가 완성된다. 무형의 데이터가 귀중한 자원으로 취급받고, 데이터 간 연관 관계(correlation) 분석이 자원 낭비 없는 경제적 생산의 필수 기술로 부상한 것이다. 테크 산업의 전성기다. 그러나 AI의 등장은 리걸테크, 핀테크, 메디테크를 다음 단계로 끌어올렸다. 사람의 개입 없이 자율 최적화를 달성하는 지능의 탄생이다. 자율은 자동(automation)과는 다르다. 정해진 조건에 따라 반복적인 업무를 맴도는(loop) 것이 자동이다. 그러나 자율은 조건이 변화하면 거기에 맞춰 ‘스스로 알아서’ 조정한다. 컴퓨터가 인식과 판단, 즉 인지(cognition)를 구현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인공지능이란 이름이 붙었다. 인공지능의 산업 지능화 초기에 법률·금융·의료 등 전문 서비스업이 주로 거론되는 것은 AI가 인간의 일부 정형적·반복적인 정신노동을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블루칼라 직군보다 화이트칼라 직군에 인공지능의 진출 사례가 먼저 보이는 이유다. 하지만 AI의 지능화 물결은 점차 제조업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조선, 가전 등 전통 제조업의 최상류이자 전초기지인 공장에 AI 기술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독일의 인더스트리 4.0이 대표적이다. 서비스업, 제조업은 물론이고 농업·어업 같은 1차 산업에도 AI 농부, 어부가 들어가고 있다. 나아가 종래의 업종 구분에서 벗어나 AI를 중심 사령탑으로 사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며 산업이 재편, 융합된다.
인공지능이 두렵고도 기대되는 것은 매우 강력한 융합성 때문이다.
역사상 그 어떤 혁신보다 더 심대하고 근원적인 대변화를 초래하리라는 예언은
바로 이 융합 속성에서 나온다.
AI가 바꾸어나갈 산업계의 모습은 과거 1, 2, 3차 산업혁명의 양태2를 살펴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차 산업혁명은 인간과 동물의 생물학적 완력을 기계적 열역학 에너지로 대체하는 과정이었다. 팽창하는 수증기의 힘을 이용한 초기의 증기기관은 화석연료를 기화시켜 직접적인 폭발력을 머신 파워로 전환하는 내연기관으로 진화했다. 근대 국가의 경제적 하부구조 형성에 기여한 18세기의 생산력 증대는 지방 향토에 흩어져 살던 농민을 공장 노동자로 이주시켜 도시를 형성하고 귀족의 몰락과 신흥 부르주아의 탄생을 초래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나온 배경이다. 최초의 산업혁명이 무르익어 해외 식민지 개척으로 이어지고 제국주의 국가 간 충돌이 노골화되면서 영국의 패권이 미국으로 넘어갈 19세기 무렵에 2차 산업혁명이 점화됐다.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법칙이 알려졌으며, 전기의 상업적 이용을 둘러싸고 에디슨과 테슬라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무공해 에너지인 전기는 실내 기계의 가동을 확산시키면서 TV, 냉장고, 세탁기의 3종 신기를 중산층 가정마다 보급했다. 포디즘의 시대, 대중사회가 활짝 열린 것이다. 바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산업사회다. 정보화로 넘어가는 후기 산업사회와 구별해 1, 2차 산업혁명 시기를 전기 산업사회라고도 한다. 20세기에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산업사회는 정보사회로 진전되기 시작한다. 1, 2차 유형 산업보다 3차 서비스 산업의 부가가치가 더 커지기 시작하는 무형 산업, 문화 산업의 시대다. 정보화는 초연결의 인터넷이 꽃피우면서 절정을 이룬다. 원자(atom) 경제에서 비트(bit) 경제로 이행된 것이다. 인터넷 사업에서는 기존 경제 상식을 뒤집은 롱테일 법칙, ‘왝더독’ 효과가 나타난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Fortune)》이 선정한 500대 기업 명단에서 에너지, 철강, 자동차 등 제조업 명가의 순위가 내려가고 구글, 애플, 아마존 같은 IT 서비스 기업이 그 자리를 채웠다. 여기까지가 1, 2, 3차 산업혁명 시기에 나타난 산업화-정보화 사회의 모습이다.
AI가 본격 활약할 4차 산업혁명 사회의 모습은 이 같은 과거의 흐름에 지능화라는 새로운 변수를 대입해보면 상상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두렵고도 기대되는 것은 매우 강력한 융합성 때문이다. 역사상 그 어떤 혁신보다 더 심대하고 근원적인 대변화를 초래하리라는 예언은 바로 이 융합 속성에서 나온다. 1, 2, 3차 산업을 뒤섞는 효과 말이다. 1, 2차 산업혁명은 기본적으로 동력 혁명이었다. 다시 말해 유형의 기계나 설비를 빠르고 강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인공의 힘을 만든 것이다. 반면 3차 산업혁명은 컴퓨터라는 계산 기계가 통계 정보라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무형의 서비스 혁명이었다. 평행 우주처럼 리얼 월드와 나란히 창조된 사이버 월드가 생겨났다. 그러나 말 그대로 1, 2차 산업혁명과 3차 산업혁명의 주체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 컴퓨터 간 연결로 인터넷 세상이 만들어졌지만 리얼 월드는 리얼 월드끼리, 사이버 월드는 사이버 월드끼리 분리돼 있었다. 이 두 세계를 연결, 융합시키는 교량이 인공지능이다. 동력 혁명 때 탄생한 냉장고, 자동차, 공장에 AI가 접목되면 스마트 가전, 스마트 카, 스마트 팩토리로 바뀐다. 아톰의 실물성에 비트의 통계적 계산이 합쳐진다. 스마트 팩토리를 예로 들어보자.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개념은 공장 사물인터넷(IoT)으로 경영과 생산 현장을 연결한다는 것이다. AI는 공장의 방대한 IoT 데이터를 분석해 최적의 작업량을 제시해준다. 동시에 판매 데이터를 보고받는 경영진에게 실시간 수요에 맞춘 생산 및 재고의 목표 수치도 계산해준다. 따로 놀던 생산과 판매의 실시간 데이터가 AI 장군의 지휘 아래 통합군으로 단일 편성되는 셈이다. 이처럼 AI의 융합 현상은 농업부터 첨단 게임 산업까지 전 산업에서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아마존이 유통에 이어 AI 스피커 제조에 나서고, 현대자동차가 모빌리티 서비스로 영역을 확장3하는 등 업종 간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이유다.
이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다. 이 용어에 대한 적실성(適實性) 논란은 있으나 고전적 산업혁명의 개념에 정보화 2단계, 즉 지능화를 가미한 시기 구분으로 시간 축의 좌표를 설정하면 무난할 것이다. 최근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라고 하면 정보화 1단계의 컴퓨터 투입에 따른 전산화, 그리고 컴퓨터 간 연결에 의한 인터넷화와 구별되는 인공지능 투입, 지능화까지 의미하는 것으로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 혹자는 4차 산업혁명을 별도로 구분할 필요 없이 고도 정보화 단계 정도로 포섭하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디지털 전환의 지능화는 역대 어떤 사회, 경제적 변화보다 훨씬 더 큰 메가톤급 퍼펙트 스톰을 불러올 것이라고 내다보는 전문가가 더 많다. 이들은 경제, 특히 산업적 측면에서도 재편(restructuring) 수준이 아니라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에 가까운 제로베이스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하곤 한다. 다시 말해 기존에 대세를 점하던 사업이 사라지고, 전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업종이 등장하는 등 마치 지구 생물의 진화 과정에서 고생대 캄브리아기 생명 대폭발과 중생대 공룡 멸종처럼 주도권 교체가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자동차 산업은 모빌리티 서비스 플랫폼 비즈니스,
일종의 교통망 설계로 진화하는 단계를 맞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공지능이 있다.
어느 쪽 주장이 옳든 간에 인공지능의 산업계 접목은 비즈니스의 성격 자체를 뿌리부터 흔들어 변화시켜나갈 것이란 분석에는 대부분 공감하는 편이다. 첫째, 산업이 제공하는 효용과 가치가 달라진다. 가장 쉬운 예는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처음에는 자동차에 인공지능을 적용한 자율주행차가 대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율주행차가 기술적 완성도의 미흡뿐 아니라 각국의 교통법규 및 제도와 충돌을 일으키면서 도입이 지연되자 도심형 항공기(UAV)나 킥보드 등 뉴 모빌리티, 마이크로 모빌리티 같은 새로운 대안 교통수단이 뜨기 시작했다. 이는 업(業)의 정의가 변화함을 의미한다. 자동차란 유형의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제조업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공간을 옮겨 가는 이동 편의를 제공하는 모빌리티 서비스로 성격이 바뀌는 것이다. 자동차 산업은 이제 환경을 중시하는 생태적 가치와 쾌적한 무인 주행의 효용을 제공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점과 점을 연결하기 위해 공간 이동 복합 네트워크를 영리하게 편성하는 모빌리티 서비스 플랫폼 비즈니스, 일종의 교통망 설계로 진화하는 단계를 맞고 있다. 그리고 그 설계의 중심에는 인공지능이 있다.
둘째, 산업계의 효용 공급자인 기업과 수요자인 개인의 관계도 변하고 있다. 대량생산 시대에는 비즈니스의 수직적 통합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원료부터 반제품 조립, 최종 소비재 출고와 유통 및 애프터서비스까지 1개의 단일 기업이 직접 소유하거나 하청 관계로 편입한 기업군을 통해 전 생산과정의 부가가치를 독점한 것이다. 커피로 치면 남미 위탁 생산 농가의 원두 생산에서 미국 뉴욕 스타벅스의 캐러멜 마키아토 서빙까지 강력한 중앙집권 통제가 이루어졌다. 이른바 전 지구적 공급망, 가치 사슬(global value chain)을 통해 가장 저렴하고 이윤이 많이 남는 곳을 묶어 네트워크가 짜여졌다. 소비자는 글로벌 초거대 기업이 주는 대로 받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버의 예를 보자. 핵심인 이동 서비스는 긱(geek) 노동자를 통해 필요한 만큼 알아서 노동력이 투입된다. 우버 택시 자체의 소유권도 개인에게 맡겨져 있다. 우버는 유형의 토지나 설비, 자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갖춰야 할 것은 수요자(승객)와 공급자(우버 기사)를 실시간 연결할 파워풀한 서비스 네트워크뿐이다. 이를 정교하게 구축하고 개선하기 위해 인공지능이 투입됨은 물론이다. 우버, 에어비앤비 같은 공유 기업은 고객의 이동, 숙박 수요를 군더더기 없이 가장 싸고 빠르면서 쉽게 충족시키는 데 사활을 건다. 고객은 별점 부여, 후기 등을 통해 기업과 피드백하며 느슨한 동맹을 맺는다. 기업과 고객 간의 함수는 산업 시대의 상하 내지 갑을 관계에서 수평 내지 연대 관계로 SNS화한다. ‘소셜’과 ‘네트워크’, ‘서비스’는 4차 산업혁명 기업의 키워드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면 생산자와 소비자의 융합으로도 볼 수 있다. 패션 산업에서 고객은 의류업체가 만든 옷을 수동적으로 입기만 하는 존재에서 새로운 취향을 제안하고 원하는 제품을 생산토록 유도하는 프로슈머(prosumer)로 진화하고 있다. 2011년에 창업한 미국의 스티치 픽스(Stitch Fix)는 가입자의 신체 치수뿐 아니라 선호 브랜드 등 패션 취향, 직업, 재정 상태까지 입력받아 AI 알고리즘으로 좋아할 만한 옷 다섯 벌을 집으로 배달해준다. 고객은 원하는 제품만 구입하고 나머지는 돌려보내면 된다. 맞춤형 쇼핑 과정에서 고객의 의견과 취향은 다음 패션 트렌드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음악 산업 역시 무명의 유튜버가 올린 창작곡이 메이저 음반사의 히트곡으로 부상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거리가 과거보다 훨씬 가까워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생산방식과 지능화 개편의 적절한 믹스가 기업의 사활을 결정하게 된다. 인공지능 기술은 앞으로 MS의 윈도처럼 모든 IT 서비스에 기본 패키지로 붙어 한 묶음으로 제공될 확률이 높다. 인공지능이 없으면 죽기 때문에 너도나도 도입에 앞장선다. 하지만 사업의 어떤 영역에,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위하여 AI를 투입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역효과가 나기 십상이다. AI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진행형 기술이다. 매우 우수한 효율을 내는 분야가 있는가 하면, 어설프게 접목했다가 ‘아날로그 온리’만도 못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AI 외주 이전에 기업인은 자신의 비즈니스에 대한 정확한 속성 파악과 목표 설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도입하려는 AI 기술의 장점과 단점, 성능과 한계 등을 알아야 한다. 경영자는 결국 어디까지 AI화하고 어느 영역은 기존 방식대로 남겨둘 것인가, 혹은 AI와의 믹스 비율을 몇 %까지 가져갈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앞으로 기업은 AI를 제대로 알고 활용하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으로 나뉠 것이다. 동력 혁명과 정보 혁명에 대응하지 못한 기업이 퇴출됐듯이 AI 믹스의 지능화를 영리하게 수행하지 못한 사업은 공룡처럼 멸종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지능화란 무엇인가. 사물에 두뇌가 들어가는 것이다. 지능이 접목되면 물건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스스로 생존(항상성 유지)할 수 있다. 나아가 번식(재생산)까지 가능해질 것이라는 과격한 예상도 있다. 이렇게 되면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희미해진다.4 천연 지능과 인공지능의 협업이 이뤄질 수 있다. IT 혁명 후 바이오 혁명이 5차 산업혁명을 열어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여기서 사물에 지능을 부여하는 디바이스이자 소프트웨어가 인공지능이다.
AI는 미래의 전기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다. 모든 산업의 동력으로 전기가 보편적으로 보급됐듯이 AI가 지능화의 두뇌 역할을 하는 필수 인프라로 물처럼, 전기처럼 자연스럽게 사회와 산업의 전 부문에 스며든다는 예측이다. 따라서 AI를 차별적인 고급 기술로 자체 육성하기보다 시장에서 내놓은 범용 서비스 패키지 상품으로 쉽고 편하게 소비하게 될 것이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도 이미 나타났다. 미국의 데이터 사이언스업체 SAS는 AI 솔루션을 하나의 앱이나 소프트웨어 번들처럼 서비스 상품으로 제공한다. ‘서비스로서의 AI(AIaaS)’란 개념이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현재 대세 기업의 AI 활용 방식과 전혀 다르게 접근한 도전자의 발상 전환이다. 데이터 분석을 주로 해온 SAS는 자사의 인공지능 서비스를 일종의 운영체제(OS)나 앱처럼 소프트웨어 서비스로 소비자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이 AI 앱을 깔고 자신에게 발생하는 데이터를 입력해 분석을 맡기면 된다. SAS는 앱 이용료만 받고, 소비자는 AI 분석 데이터의 효용에 만족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일종의 AI 소매점, AI 실핏줄 민주화라고나 할까. 그간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은 중앙에 AI를 딱 배치하고, 소비자에게 ‘데이터를 모두 갖다 바쳐라. 그럼 내가 너희들에게 편리하게 가공한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제공해주마’라고 호령했다. AI라는 중앙 사령탑, 브레인을 거대 기업이 독점하고 있으니 힘없는 소비자는 그저 ‘처분만 바랍니다’ 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프라이버시 데이터를 주고 잘 관리해주기만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SAS는 분산 AI 서비스를 제공한다. 절에 부처님을 모시듯 AI를 본부에 묶어두지 않고,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AI 부처님이 거리로 나가 민중에게 포교를 하는 것이다. 마치 원효대사의 정토종(淨土宗) 사상 같다. 그를 불교의 대중화, 민주화 성자로 부른 이유는 높은 곳에 있던 부처를 저잣거리로 끌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SAS는 AI 신(神)을 민중의 품에 안겨준 ‘AI 업계의 원효’로 추앙받게 될까? 원효의 또 다른 사상 중 하나로 화쟁(和爭)이 있다. 서로 대립하는 이론과 사상이 사실은 하나란 주장이다. 원융회통(圓融會通), 모든 것이 AI를 중심으로 융합되는 AI 컨버전스(Convergence) 시대에 어울리는 화두다. 인공지능은 기존 제품에 지능을 더한다. SAS가 공장과 사무실에 AIaaS를, 애플이 스마트폰과 가전제품에 시리(Siri)를 얹어 파는 것처럼 이미 사용 중인 설비와 장비에 AI 기능을 신규 탑재 혹은 추가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가 보편화할 것이다. 10년만 지나면 구글류의 중앙집권형 AI 기업은 사라지고, SAS와 같은 분산형, 그것도 블록체인 기술과 결합한 분산 보안형 AI 기업이 대세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분석5도 있다.
AI 믹스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기업만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될 것이다.
크게 두 가지 방향의 변화가 예상된다. AI가 투입된 범용 산업과 AI의 골격을 만드는 고부가가치 산업의 분화다. 지금 《포천》이 선정한 500대 기업 중 구글, 애플, 아마존, 삼성전자 등 IT 서비스 내지 반도체·첨단 전자 기기 제조업체들이 윗줄을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미래의 기업 명단에는 AI의 골격을 설계하는 구글 딥마인드, ARM과 같은 고급 두뇌 집단, 그리고 범용 AI 패키지를 대량생산하는 기업, 유통하는 기업, 이를 현실의 다른 산업과 접목해주는 전문가 집단이 맨 위쪽 하이엔드를 형성할 것이다. 다음은 이들로부터 AI 제품과 서비스를 받아 기존의 아날로그 산업을 혁신해나가는 전통 기업들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AI 기술을 제대로 알고 ‘아날로그 플러스 AI’의 AI 믹스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기업만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될 것이다. 바뀐 AI 입시 제도에 적응해 고득점을 올린 우등생과 미처 따라가지 못한 낙제생으로 손 바뀜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기업이 살아남게 될까. AI 산업 재편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융합이다. 산업 시대와 정보화 시대의 1, 2, 3차 산업 구분이 소용없어진다. 농업과 어업도 지능화 기술이 접목되면서 무인 원격 관리, 인공지능 자동 사육이 보편화한다. 소규모 정밀 운영이 가능해지면서 도시 농업, 도시 어업도 늘어날 것이다. 2차 제조업도 인공지능 공장이 늘어나면 무인화가 더욱 진행되면서 공정 개선의 연구 랩과 제조 로봇 시설로 이원화하는 경로를 밟는다. 앞서 예로 든 자동차 산업처럼 제조업 자체가 서비스업과 융합돼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는 식으로 업(業)의 개념이 바뀐다. 즉 비즈니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에 비례해 더욱 거대한 메가 글로벌 기업이 탄생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는 인간 산업이다. 인간의 감성, 문화, 여유가 향상되면서 이를 조장하는 비즈니스가 늘어난다. 먹고 자고 거주하는 의식주의 기본 욕구는 AI 로봇이 모두 채워준다. 인간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처럼 사유하고 예술하고 향유하는 존재로 변해갈 것이다. 비전문가의 전문가화, 시민 모두가 공부하는 철학자의 시대가 도래한다. 현인 정치보다 더 진화한 현인 사회의 이상향이 현실에 구현될 수 있다. 이런 세상에서는 사람들을 공부시키고 예술을 체험하게 하고 즐겁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비즈니스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지적으로 자극되고 예술적으로 고양되고 감정과 쾌락에 충동질하는 그 무언가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 이를 인간 산업(Human Industry)으로 명명해보자. AI 시대에는 무엇이 인간다운 것이냐는 질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더 집중되고, 인간다움으로 정의된 새로운 가치와 효용에 소비도 집중될 것이다. 기업은 당대의 관심과 소비가 몰리는 집결지로 다시 모이게 돼 있다.
셋째는 제도 혁신이다. 융합과 인간 산업화는 혁신을 요구한다. 기존의 벽을 부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면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 창조적 파괴다. 기업 스스로 혁신 친화적으로 체질을 바꾸어가야 한다. 고체 기업은 유연한 액체 기업으로,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곳곳에 산재한 가벼운 원소로 이루어진 기체 기업으로 진화해야 한다. 산업계 재편을 지원할 공공 부문의 혁신 또한 매우 중요하다. 각국 정부가 4차 산업혁명에 맞춰 입법, 사법 행정을 IT화, 지능화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민간 기업의 내부 혁신과 정부의 외부 혁신이 합쳐져야 AI 시대의 최후 승자가 될 수 있다.
앞으로 모든 기업은 과학기술 기업이 된다. 테크놀로지에 기반하지 않은 어떤 비즈니스도 성립 불가능하다. AI는 정치, 언론, 교육에 이어 윤리까지 바꾸고 있다. 사회 전반의 기술 문해력(technology literacy)을 제고해 4차 산업혁명의 파도를 슬기롭게 넘어야 110년 전 개항기의 국권 찬탈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