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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어떻게 ‘우리’가 되고자 하는가?

초국가적 문화 현상, 《기생충》은 왜 세계의 승리인가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주요 4개 부문에서 수상한 것이 큰 화제였다. 101년 한국 영화사를 새로 썼을 뿐 아니라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인 할리우드를 송두리째 흔들었기에 그 진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듯싶다. 92년 아카데키(오스카) 역사상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비영어 영화는 10여 편에 불과했고, 아무리 뛰어난 영화일지라도 ‘외국어 영화상’이라는 칸막이로 구별해왔다. 그동안 오스카는 백인 남성 중심(#OscarsSoWhite)이라는 비판에도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아카데미의 영화적 취향이 한국어 대사 100%에 한국 배우만 출연하는 영화를 포용적으로 맞이한 일은 매우 상징적이다. 《기생충》은 배경과 언어가 한국적일 뿐 전 인류가 맞닥뜨린 사회적, 물질적 격차에 대한 세계성과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 완성도 높은 아트 필름인데도 쉽고 재미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은유의 블랙코미디로 서구 사회에서 대상화된 아시아적이고 이국적인 볼거리와도 거리가 멀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상생하지 못하고 서로 기생해 살아가는 사회경제구조일 때 어느 나라에서건 필연적으로 빈곤, 실업, 계급 갈등을 겪는다는 이야기로, 제도나 정책에서 비껴간 사회적 존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AP 통신이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을 “세계의 승리”라고 평한 배경에는 인류가 직면한 끔찍한 고통의 문제를 사실적으로 다루었다는 의미가 담긴 게 아닐까 싶다.

기생충

흥미로운 것은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의 팬덤이 수개월 만에 대규모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오스카 캠페인 홍보를 담당했던 마라 벅스바움(Mara Bucksbaum)은 미국 영화 매체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대한 풀뿌리 운동을 느꼈고, 계속 눈덩이처럼 커졌다”라고 밝혔다. 셀러브리티와 영화광들은 온라인에서 ‘#봉하이브(BongHive)’1라는 해시태그와 ‘제시카 징글’을 비롯한 극 중 장면을 ‘밈(meme)’으로 창작해 공유하면서 열정적 지지를 보냈다. 이들은 “이 영화는 꼭 봐야 한다. 한국 문화와 한국 음식을 몰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두 번, 세 번 보라. 당신과 나, 우리의 이야기다”라며 온라인 공간에서 기발한 아이디어와 코멘트로 신드롬을 생산했다.

‘우리’라는 문화 신권력의 흐름

우리는 대대로 영토, 언어에 의해 국가와 민족이라는 구획을 나눠 공동체 문화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초연결의 사회를 살고 있는 ‘디지털 네이티브’(어린 시절부터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는 어젠다를 만들어가는 방식에서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잘 느끼지 못한다. 대부분의 SNS에는 자동 번역 기능이 있다. 인공지능 기반의 번역 앱도 다양해져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덕에 전례 없이 빠르게 결속할 수 있다. 그래서 디지털 인류는 사소한 개인의 관심사에서부터 환경, 차별, 양극화, 질병, 난민 등과 같은 인류 공통의 문제까지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논의하고 공론화하는 데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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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지적인 문화가 세계의 이야기로 퍼져가는 현상은 앞으로 더 잦아질 것이다. 우리 문화는 이미 케이 팝, 케이 드라마, 케이 무비, 케이 푸드, 케이 뷰티 등 세계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제러미 하이먼즈와 헨리 팀스는 자신들의 저서 《뉴파워: 새로운 권력의 탄생》에서 이런 현상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과거 권력자와 달리 협력에 열려 있고 자신들의 세계를 개방해 외부자가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한다.2 이들 신권력에게 권력이란 소유하는 게 아니라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일정한 방향의 흐름(current)이기 때문이다. 의도한 결과를 얻는 능력으로서의 권력은 이 흐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개방적이고 참여적일 때, 동료 집단에 의해 움직일 때 확산의 정도와 규모가 커진다. 실제로 온라인 공유는 영향력 있는 소수의 사람보다 작은 집단에서 활발한 연결이 이루어질 때 빠르게 확산된다. 사회물리학 분야의 대가인 MIT 미디어랩의 알렉스 펜틀런드는 유명인이나 아이디어가 많은 한 사람보다 타인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수확하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과 교류를 유지하는 이들이 역동적으로 변화를 주도한다고 말한다. 여러 사람의 활발한 탐험과 참여가 ‘아이디어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이 과정에서 협력과 소통 방식에 대한 ‘사회적 학습’이 이루어져 행동을 촉진한다는 것이다.3

《기생충》 신드롬도 온라인 네트워크의 작은 집단 사이에서 몇 개월 만에 빠르게 확산된 새로운 흐름이다. 이 흐름에서 다른 이들의 행동과 이야기를 관찰하며 새로운 문화와 상황을 배우는 다양한 사회적 학습이 발생한다. 가령 앞에서 언급한 밈은 소셜 미디어상에서 유행처럼 새롭게 재생산되어 놀이처럼 참여하는 반향 효과를 이끌어냈다. 독창적이고 유머러스한 영화와 감독과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참여가 활발해지면서 높은 에너지의 흐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방탄소년단 ⓒshutterstock

방탄소년단 팬 아미(ARMY)의 ‘슬기로운 덕질 생활’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아이콘인 방탄소년단과 그들의 팬덤 아미(ARMY)는 신권력의 흐름과 사회적 학습을 효과적으로 이뤄낸 대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티스트와 팬이 온라인에서 대규모 소통의 흐름을 만들면서도 서로 창의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음악 콘텐츠의 완성도와 진정성 있는 스토리텔링 때문이다. 방탄소년단은 부조리한 세태를 비판하거나 자신들이 겪은 좌절과 고통, 슬픔, 고뇌, 기회의 박탈을 음악으로 솔직하게 들려주며 위로와 희망이 필요한 이들에게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우리를 사용해달라”고 말한다. 케이 팝을 오래 지켜봐왔다는 음악평론가 김영대 씨는 “음악사에서 당대를 규정했던 작품은 노래와 창작자가 빈틈없이 완벽하기보다 작품과 수용자 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이라는 관계를 통해 채워지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방탄소년단이 충격적이었던 건 사운드와 비주얼이 아니라 청춘의 꿈, 행복, 유혹, 좌절, 희망의 서사가 일관된 주제 의식에서 음악과 밀도 있게 어우러지기 때문”이라고 평했다.4

그렇다면 대부분 한국어 가사인 이들의 노래와 인터뷰, 영상은 어떻게 전 세계 아미들에게 가닿았을까. 세계 각국의 팬들은 아티스트가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노래하고 소통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스트레스받는 걸 원치 않는다. 그래서 ‘너희의 수고는 우리가 알아줄게’라며 한글은 팬인 우리가 배울 테니 원래 하던 음악을 계속해달라는 메시지를 다양하게 생산해냈다. 방탄소년단과 팬들은 주로 트위터와 공식 커뮤니티인 ‘위버스’를 통해 소통하는데, 멤버가 메시지를 남기면 실시간으로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한 답글 멘션이나 트윗이 글 타래로 올라온다. 영어, 중국어, 아랍어, 스페인어, 태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러시아어, 힌디어, 포르투갈어 등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세계 각국의 BTS 트위터 번역 계정에서 번역 글을 리트윗(RT)하면 몇 초도 안 걸려 전 세계로 이들의 소식이 퍼져나간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이 출연한 영상과 다양한 콘텐츠에 대한 번역물과 이를 활용한 창의적인 메시지 밈을 계속 재생산한다. 최근에는 한글 발음과 뜻을 주석으로 다는 트윗이 유행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전 세계 아미들은 한글날인 10월 9일에 ‘#HangulDay’와 ‘#방탄때문에_한글배웠다’ 등의 해시태그를 달고 한글 노래 가사를 또박또박 적은 글씨를 트위터에 공유하는 축하 이벤트까지 펼치고 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시고 방탄소년단이 세상에 한글을 전파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트위터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와 한글이 혼합된 트윗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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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이상이 우리말인 노래가 한날한시에 전 세계 1위를 하는 일이 예사가 된 까닭도 이런 소통 구조 때문이다. 올 1월에 발표한 신곡 ‘블랙스완’은 바로 다음 날 세계 93개국 아이튠즈 차트 1위를 석권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미 아티스트와 팬은 빌보드 200 앨범 차트 1위나 영국 오피셜 앨범 차트 1위라는 위대한 기록을 함께 만들고 경험해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과거에는 장벽으로 여겨진 언어와 지역이 팬과 아티스트, 팬과 팬 사이에 유대의 흐름을 만드는 촉진제가 되어 사회적 학습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만큼 뛰어난 추진력으로 창의적인 팬 활동을 하는 우리나라 문화 소비자들의 능력 덕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과 팬덤은 매우 독창적인 문화적 산물이자 향유 문화로 정착되는 추세다. 가령 방탄소년단 팬 커뮤니티인 ‘아미집(ARMYZIP)’은 아티스트를 인격체로 존중해 모든 멤버를 아껴주고 사랑하며 칭찬과 응원을 해달라는 내용의 ‘슬기로운 덕질 생활’을 만들어 팬들에게 배포했다. 콘텐츠에 비용을 지불했다고 아티스트의 행동과 취향을 간섭하고 통제하는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니, 음악과 무대로 소통하고 함께 행복한 팬 활동을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탄소년단 현상에는 ‘우리’가 함께 ‘우리의 행복’을 만들어간다는 보편적인 공감의 정서가 있다.

ⓒshutterstock

눈치 보는 사회에서 위로받고 싶은 ‘우리’

온라인에서 ‘우리’로서 행복을 추구하고 공동의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활발히 전개되는 까닭은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외로운 개인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통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외로운 개인의 증가는 명백한 현상이다. 그 원인을 하나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영화 《기생충》의 주인공 가족에서 보듯 실패와 실수에 대한 사회적인 재기의 기회가 희박하고 불관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난해 말 재미 교포 유니 홍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 “한국인들이 행복과 성공에 이르는 비밀”에서 한국 사회 특유의 ‘눈치(Nunchi)’가 ‘경직된 사회(tight culture)’를 만든다고 지적했다. 경직된 사회일수록 눈치를 보게 되어 딱히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 연구를 인용해 규범과 규칙이 요구되는 사회일수록 개인의 행복은 떨어지고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우울 장애를 겪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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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놀이’와 ‘여가’의 반대 개념을 ‘일’ 또는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놀이심리학자들은 놀이의 반대 개념은 ‘우울감’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우울감을 겪으면 무능력함을 비관하게 되어 기분이 침체되며 활동 부족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낙관적 유능감과 활발한 놀이 활동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최근에는 온라인을 통해 여가와 오락 활동,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는 더 이상 일이 아니다. 스마트폰 덕에 서로 늘 연결되어 있어서 생각이 같은 ‘우리끼리’ 놀이를 하기도 쉽다. 예컨대 거대한 팬덤이 빠르게 형성된 EBS 《자이언트 펭TV》 펭수 뒤에는 캐릭터에 공감하는 다수의 ‘우리’인 펭클럽이 있다. 펭수에 환호한 사람들은 힘겹고 외롭게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이들’이었다. 펭수가 눈치 보는 사회와 꼰대적인 틀을 사뿐히 무시하며 사장님에게 “김명중!”이라고 외치면, 이들 펭클럽은 영상을 공유하고 댓글로 응원하는 놀이를 펼쳤다. 어린이, 청소년 대상 캐릭터로 개발된 펭수가 뜻밖의 ‘우리’에 의해 ‘핵사이다’ 맛 캐릭터로 재해석되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 갈급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개인 간에 발생하는 사회적 문화 현상을 파악해 정책을 수립하는 일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소통 방법은 다양하게 열려 있지만 소통 방식을 모르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수많은 개인이 왜 ‘우리’로 연대하는 경험을 열망하는지, 이들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토대로 실효성 있는 정책이 추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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