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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에 거는 기대

한국종합사회조사(KGSS)를 포함하여 각종 여론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질문이 있다. 보통 ‘국가·사회 기관 신뢰도 조사’라고 부르는 해당 문항은 여러 기관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묻는다. 한국에서 해당 문항이 사용된 이래 국회에 대한 기관 신뢰도는 행정부, 사법부, 언론, 대기업 등과 비교하여 한 번도 압도적인 꼴찌를 벗어난 적이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지 않더라도 누구나 이것을 예측하고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국회는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국회는 대통령을 필두로 한 행정부나 사법부보다 그 순서에서 앞선다. 비록 권위주의 정권하의 헌법에서 국회가 후순위로 내려간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대의(代議)의 전당이며, 이러한 기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가 가장 낮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런데 기관 신뢰도의 인기투표에서 의회가 꼴찌를 차지하는 것이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면 그것은 한국 국회만의 문제는 아닌지도 모르겠다.

의회는 갈등의 충돌 지점이다

사람들은 의회에 대해 비판하기를 좋아한다. 의원들은 직업적 관료들에 비해 너무나 비전문적이며, 이들은 나라 전체의 장기적 비전을 생각하기보다는 지역구나 부문의 특수 이익을 앞세운다. 이들 의원이 내세우는 이익들 간의 충돌이 국회에서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또한 너무나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비전문성, 특수 이익, 그리고 비효율성으로 무장한 300명의 ‘악동’들이 금배지를 달고 국정을 좌우하는 모습이 모든 신문과 방송의 정치 코너를 점유하고 있다. 그 결과 국회와 의원들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스포츠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

그러나 돌이켜보면 국회의원들이 비전문성과 특수 이익, 그리고 비효율성으로 정의되는 것은 어쩌면 그들이 대표하는 우리를 꼭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마치 거울에 비친 우리의 정치적 얼굴을 역겨워하는 것과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선거에서 이들을 뽑은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며 국회에서 일어나는 ‘몹쓸 일’들은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 ‘외주를 준’ 역할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모여 사는 공동체에서 갈등은 항상 존재할 것이고, 그 공동체의 자원을 배분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며, 공동체가 움직이는 방향을 결정하는 장소는 이러한 수많은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곳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낳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총칼과 내전(內戰)을 통하지 않고 지루한 말싸움과 타협으로써 해결하는 곳이 의회라면, 의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람들이 피 흘리고 죽어가는 내전에 비하면 수십 배는 나은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 에서 나는 21대 국회가 나라의 갈등과 다툼을 부끄럽게 여기며 피하고 숨기기보다는 좀 더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폭발시키기를 원한다.

21대 국회는 굳이 이름 붙이자면 ‘일상 회복의 국회’가 되었으면 하고, 그 임기 중에 ‘일상의 국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런 21대 국회의 성공을 진심으로 염원한다.

대리인과 신탁인 사이에서

이와 관련된 해묵은 정치학의 논쟁은 개별 국회의원이 과연 국가의 일과 지역구의 일 중 어느 것에 선차성을 두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의원이 국민의 대리인(delegate)인지 신탁인(trustee)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의원이 만약 국민의 단순한 대리인이라면 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뽑아준 지역 구민의 의견과 이해를 단순히 대변하는 것이다. 반면 그가 국민으로부터 전반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신탁(信託)인이라면 자신의 경험과 양심을 다하여 국가 전체의 안녕과 이해를 위해 판단하고 표결해야 할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브리스톨에서 행한 유명한 연설에서 이러한 ‘신탁인’의 입장을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중략) 의회는 상이하고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지닌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들의 협의체와는 완전히 다르며, 한 나라의 전체 이익을 대표하고 보편적 이성에 바탕하여 숙고하는 회의체이다. 여러분들이 스스로의 대표를 선택한 것이 사실이지만 일단 대표 자가 선출되는 순간 그는 이제 브리스톨의 일원이기에 앞서 의회의 일원이다. 만약 전체 이익에 반하는 지역 구민들의 특수 이익과 성급한 의견이 있더라도 의원은 이를 따라서는 안 된다.”

국회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재선과 다선에 성공하는 의원은 결국 중앙정부로부터 쪽지 예산을 따내고 동네에 다리를 개통하는 ‘대리인’의 차지임을 알고 있다. 누구나 이러한 근시안적이고 단세포적인 ‘대리인’을 비난하고 공격할 수는 있겠지만, 그가 당신의 지역구에서 선출된 의원이라면 입장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누구나 비난하기 좋아하는 비례대표—한때는 ‘전국구’라고도 불렸던—의 장점이 오히려 명백해진다.

또한 마냥 ‘신탁인’의 입장을 옹호할 수만도 없다. 국가의 장기적이고 균형적인 발전을 고민하며 자신의 역량과 양심과 비전에 따라 위임받은 입법권을 알아서 행사하겠다는 이들을 무턱대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 역량과 양심과 비전을 크게 좌우하는 것이 만약 당론이라면, 차라리 지역 구민의 눈치를 살피는 의원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의회를 바라보는 미국적인 전통은 차라리 특수 이익의 자유로운 경합 속에서 전체 이익이 의회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기를 희망하는 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비관적인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첫째, 의원들은 애초 대리인과 신탁인이라는, 혹은 부분과 전체라는, 혹은 장기와 단기라는 여러 길항 관계를 동시에 고려하고 대변해야 하는 상당히 모순된 역할을 부여받았다. 둘째, 의원들은 이 중 어느 한 가지 역할만을 선택적으로 수행할 수 없으며, 그 경우에는 의원 개인의 파멸이나 나라의 파멸, 혹은 양자의 동시적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셋째, 대의(代議)의 어려움, 의회라는 과정의 지난함은 결국 이런 불가능한 밸런스를 함께 찾아나가는 데 있으며, 정치의 근원적 비극이야말로 이 불가능한 과정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넷째, 이러한 불가능한 밸런스를 찾아나가는 과정에 나름의 구조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정당이며, 그 성패에 따라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는 과정을 책임정당제라 부른다.

전시 국회와 일상 국회 사이에서

제21대 국회는 그러한 거대한 불가능과 비관을 앞두고 이미 그 시작에서부터 개원의 진통을 겪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 국회가 답변해야 할 물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난해하고 근본적인 질문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21대 국회가 대면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아마도 스스로를 ‘전시(戰時) 국회’라 규정지을 수 있을지 여부일 것이다.

코로나19가 불러온 위기는 과연 전쟁이라 할 만한가. 비록 눈에 보이는 외부의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뚜렷한 전선(戰線)이 형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잃어버린 일상과 시민들이 느끼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을 우리는 전시 상황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전선은 온 국민의 생활과 잠재의식에까지 그어져 있으며, 가라앉을 것이 확실한 경제와 그 뿌리부터 재편되는 세계 질서로부터 시민들의 위태로운 삶을 막아줄 유일한 방패가 국가라면, 그것이 바로 전시 상황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21대 국회는 전시 국회로 불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지난 총선은 유권자들이 국가의 역할을 새삼 주문하는 장면이기도 하였다.

전시 국회라는 것은 ‘신탁인’의 국회이기도 하다. 전쟁을 치르는 시민들은 자신들의 지역적이고 단기적인 이해관계를 잠시 유보할 수 있을 것이며, 의원들은 공동체의 근본적인 존속을 위한 보다 시급한 문제들을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21대 국회가 ‘대리인’의 역할을 총체적으로 포기할 수도 없다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예컨대 방역을 위한 행정부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이로부터 시민들의 개인 정보와 사생활을 보호할 임무는 국회가 아니면 수행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는 길은 아직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며, 우리가 원하는 승리가 자그마한 일상의 회복이라면,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우리가 그 일상을 얼마나 포기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자문할 국회의 역할은 매우 엄중하다.

다시 말해, 방역을 위한 개인 정보 수집과 활용에서부터 긴급재난지원금,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상상할 수 없는 각종 경제 정책과 피할 수 없는 대외 정책의 결정들에 이르기까지 제21대 국회가 떠안은 짐은 전시 국회와 일상 국회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역 구민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이다.

21대 국회에 바란다

앞에서도 밝힌 것처럼, 그 과정이 결코 아름답고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행정부는 나름의 어젠다와 짜인 시간표와 우월한 전문성과 복잡한 데이터를 내세우며 결정을 종용하거나 늦추려 할 것이다. 동시에 국회 안팎에서는 여전히 여야와 지역, 도시와 농촌 간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와 이해관계들이 상이한 전망을 가지고 피할 수 없는 갈등의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어느 국회에서나 벌어지던 일이지만, 21대 국회는 이에 더하여 과연 지금이 대리인의 시간인지 신탁인의 시간인지를 매순간 끊임없이 고민할 것을 종용받을 것이다.

그런 만큼 21대 국회와 의원들은 그런 고민을 매순간 근본적으로 해주기를 바란다. 보편적 국가이익을 대변하려는 행정부나 전문가를 자처하는 관료들이나 법의 수호자인 사법부와는 달리 국회에 맡겨진 일 자체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불평하고 요구하는 일임을, 300명의 악동들이 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들에게 맡겨진 일 자체가 바로 그러한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러는 와중에 가끔 이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합의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은 온 국민의 합의와 지지가 그만큼 가까워져 있을 것이라는 무거운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그러한 숙의와 합의의 구조를 제공하는 것은 정당이며 이러한 정당의 역할과 기능을 적극 활용하기 바란다. 당·정·청의 협의가 일방 향이 아닌 쌍방향이었으면 하며, 그곳에서 여당의 발언권과 재량권이 강화될수록 원내에서 여야 간 대화와 합의가 더 손쉬워진다는 물리적 이치를 다시 되새기기 바란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정당 내부의 순진한 비판자들을 ‘내부 총질’이라는 이름으로 소외시키기보다는 이들을 감싸 안는 것이 정당의 내포를 넓히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임을,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정당 간 대화의 면적을 넓히고 동의할 수 있는 사안을 발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임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국회본회의장

코로나19가 우리의 21대 국회에 던진 숙제는 그래서 매우 모순적이기도 하다. 다양한 이해와 갈등이 수렴되고 폭발되는, 근본적으로 숙의와 합의가 어려운 국회라는 기관에 지역 구민들의 일상과 생명과 안녕을 살필 ‘대리인’의 임무와 함께 나라의 존속과 번영을 고민할 ‘신탁인’의 이중적 역할을 떠맡겼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은 바이러스 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생존하는 것이 공동체의 일차적인 목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와 생존이 결국은 시민들의 일상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에 최소한의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21대 국회는 굳이 이름 붙이자면 ‘일상 회복의 국회’가 되었으면 하고, 그 임기 중에 ‘일상의 국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런 21대 국회의 성공을 진심으로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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