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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배움의 조건, 평생학습

코로나19가 알려준 교육의 본질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추자 행동 속에 숨어 있던 본질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천지교회, 콜센터, 배달원, 선원 등 사회 흐름이 유지되는 한 주목할 필요도 없고 주목해본 적도 없는 직군·사람·현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렀다. 곧 사회구조적 모순이나 잘못된 문화적 관행에 대한 탄식과 비판이 일어났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반성도 등장했다.

교육 현장도 그랬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수업이 불가능해지면서 그간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교육의 본질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학교가 문을 닫자 학교는 매우 중요한 ‘생활공동체’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학교는 아이들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먹고 놀고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그러한 학교 공간이 사라지니 공부할 처지와 조건을 제공할 수 있는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들 사이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학업 성취도 역시 양극화되었다. 학교교육이란 아이들이 함께 먹고, 규범을 익히고, 보살핌을 받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성장이었다.

교사가 왜 중요한지도 분명해졌다. 우리의 상식 속에서 교사란 가르치는 사람, 즉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코로나19가 번지자 교사들은 온라인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과 원격으로 수업을 해보니 콘텐츠보다 관리가 문제였다. 온라인 수업에 접속하지 못하는 학생에서부터 컴퓨터만 켜놓고 딴짓하는 학생, 접속 불안정으로 중간에 ‘튕기는’ 학생 등등 무수한 이탈을 챙기는 일이 우선이었다. 사실 대면 수업을 하던 때에도 교사들의 주된 업무는 아이들을 챙기고 돌보는 일이었다. 그 돌봄 속에서 사제의 관계를 만들었다. 비대면 상황이 되니 교사가 해오던 ‘무의식적 돌봄’이 부상했을 뿐이다. 지식을 전달하는, 그래서 일방적으로 강의만 하는 사람은 교사가 아니다. ‘일타 강사’는 교사가 아니다. 코로나19가 새삼 그것을 알려준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의구심이 든다. 학교나 교사에 대한 재조명이 초유의 지구적 사태에 직면해서야 가능한 일이었나? 그런데 그게 현실이다. 학교라는 외피가 있으니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본질에 주목하기 어려웠다. 학교를 ‘운영’했을 뿐이다. 교사라는 외피와 규정된 역할 수행 때문에 교사의 소명인 학생 보듬기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시수와 학습 진도를 맞추는 것과 같은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일상이 흘렀다. 새롭게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함께 토론하면서 새로운 교육 만들기에 부심한 교사도 적지 않았지만, 사회적 차원의 주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질에 주목한다는 건 우리에게 익숙한 외피를 걷어내야 가능한 일이고, 그건 일상이 유지되는 한 거의 불가능 하다. 코로나19는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그 거대한 외피를 깬 것이다.

온라인 교육은 정말 열등재일까?

코로나19가 일으킨 일상의 균열을 그냥 봉합하지 말자는 제안이 나온다. 균열은 본질에 대한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온라인 교육은 열등재’라는 판단도 그렇다. 온라인 교육에 관한 판단은 교수 방법론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얼핏 생각하기에 대면 교육이 비대면 교육에 비해 우월할 것 같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우월한가?” “왜 그렇다고 보는가?”라고 물으면, 별로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느낌상’ 온라인은 좀 어렵더라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모아보면 이렇다. 온라인 교육은 대면 교육이 ‘얼굴을 마주 보는 만남’을 통해 무마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익숙함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를테면 대면 교육에서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아이들의 학업 준비 상태가 비대면에서는 불가능하다. 대면 교육에서는 당연하게 보장되는 교사의 권위가 비대면에서는 쉽게 보장되지 않는다. 또 대면 교육에서는 아이들의 컨디션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반면 비대면에서는 훨씬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혹은 불편함이 곧 ‘열등함’을 의미하는 것일까? 온라인이 가져오는 어려움으로 인해 교사들은 수업을 좀 더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아이들의 학업 준비 정도를 평가하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자료를 모을 수 있다. 또한 아이의 상태 파악을 위해 일대일 소통 시간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여러 교사가 온라인이 가져온 의외의 성과들을 보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온라인은 교육에 대한 더 정교한 분석을 위해 확장된 자료를 제시하는 공간일 수 있다.

출처 서울시교육청

오히려 문제는 학습 격차가 아니었을까? 온라인은 학교라는 지리적 공간을 해체함으로써 아이들을 각자의 처지에 머무르게 했다. 학습 의지가 없거나 학습 방법을 모르는 아이들, 원격 수업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컴퓨터나 학습 공간이 뒷받침되지 않는 아이들은 수업 자체를 듣지 못했다. 부모가 맞벌이이고 개별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없는 경우, 아이들은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온라인 교육이 열등재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이런 여러 사태에 대해 종합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하는 문제다. 만약 마을이 공동체적으로 아이들을 돌볼 수 있다면 온라인은 최상의 학습 매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우리는 교육을 모른다.

코로나19가 제기한 문제는 대면, 비대면의 문제를 넘어 교육이 무엇이냐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 본질적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 상황이 종결되기만 하면 곧바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예전’이란 우리의 소중한 공현존(co-presence)의 확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비교육적인 장면을 무시하면서 살았던 관행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전의 문법을 따르면 우리는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빨리 성과를 내고 곧바로 실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본질이 제기하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더욱 어렵다. 교육은 학교 담장 밖까지를 포함하는 공동의 과정인데, 예전의 문법은 학교 담장 안으로만 눈을 돌리기 때문이다. 예전의 문법에서 벗어나려면 ‘학교를 마을로, 학생을 사람으로, 학령기를 평생으로’ 넓혀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19로 인해 강요된 변화를 넘어 코로나19의 교훈을 학습한 시대를 말한다. 서둘러 눈에 보이는 급한 일들을 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어서는 안 된다.

배움에서 시작해보자

대부분의 사람이 다 교육을 경험했는데 왜 이렇게 교육에 대해 모르는가? 전 국민이 다 한마디씩 한다는 교육인데, 왜 해법이 안 나올까? 답은 간단 하다. ‘배움이 없는 가르침’만을 좋아해서다. 가르치는 일은 당연히 배움을 전제로 한다. 교육은 두말할 나위 없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조화롭게 결합된 상태이다. 그래서 잘 가르치려면 잘 배워야 한다. 배울 줄 아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의 입장을 알기 때문에 더 잘 가르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적 문법은 가르침은 우월하고 배움은 열등하다고 한다. 이는 가르치는 사람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고, 배우는 사람은 그에 복종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가르침이 명령이나 전달, 지시나 독백으로 변질된다. 그것이 우리가 교육을 모르는 중요한 이유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배움이다. 죽음학 연구자들은 ‘웰다잉(well-dying)’, 즉 잘 죽는 것의 조건이 배움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죽음을 잘 맞이하려면 삶의 과정에서 계속 뭔가를 배워 내면을 확장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잠시만 생각하면 알 수 있듯이 배움은 가르침보다 근원적이다. 가르침 없는 배움은 가능해도 배움 없는 가르침은 불가능하다. 배움은 그것 없이 삶 자체가 불가능한, 거의 본능적인 활동이다. 아기는 태어 나는 순간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살기 위해 배울 수 밖에 없다. 말은 물론이고, 웃는 것에서 걷는 것, 놀이에서 눈치까지 인간은 별의별 것을 다 배운다. 배울 줄 아는 능력이 거의 유일한 ‘본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어나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은 배움 없이는 불가능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배움의 여정이 곧 인생이다. 배움 없이는 인간이라는 종(種) 자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배움의 결정적 중요성이다.

문제는 그런 ‘배움 본능’이 가르침에 눌려 아주 일찍부터 억압된다는 거다. 배운다는 건 모르는 영역에 스스로를 던지는 일이고, 따라서 약간은 위험이 따른다. 아이들을 보자. 걸을 만하면 뛰고, 뛸 만하면 뛰어내린다. 다칠 위험을 불사하고 시도하는 것이 배움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20세기가 되기까지 여성이나 하층계급 구성원 대부분에게 공식적인 교육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소외된 계층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사회질서를 바꾸어놓을 힘을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목숨을 걸고 교육권을 쟁취 했다. 그래서 권력자는 항상 ‘가르침’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독재란 별게 아니다. 1인 혹은 1당이 국민의 배움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독재는 ‘현상 유지’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근대사회에서 학교는 능동적 배움을 삭제하는 역기능을 발휘했다. 학교가 가진 힘 가운데 하나는 ‘평가’를 통해 배우는 자들을 분류할 수 있는 권한 이다. 눈치가 없거나 질문하거나 반항적인 아이들에게는 EQ 부족, 아스퍼거 증후군, ADHD 등등의 평가가 내려진다. 치료를 위한 진단이 사회적 낙인이 되는 것이다. 학교 시스템에 가장 잘 적응한 학생은 ‘모범생’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그렇게 분류된 학생도 행복하지만은 않다. 외부의 평가에 자신을 맞추느라 배움의 본능을 억압하며 자아가 위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회는 지능과 정서, 성적과 규범 등에서 세밀한 분류화를 진행하고, 그 구획 안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결정한다. 이러다 보니 교육에서 사랑과 돌봄은 사라지고, 진단과 평가가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우리식의 ‘배움’이 생겨났다. 주어지는 지식을 암기 한다거나 시키는 활동을 열심히 수행하는 일, 무엇을 배우는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규범에 전면적으로 순응하는 일, 우리는 이런 것을 ‘배움’이라고 불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체가 빠진 배움을 바람직한 배움이라 여겼다고 할 수 있겠다. 주체가 빠지면, 남는 것은 속도다. 부모는 자녀에게, 교사는 학생에게 더 빨리 외우라고 채근했다. 이렇게 해서 ‘가장 빠른 배움’인 암기만 남았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던 능동적인 ‘배움 본능’이 사라졌다.

출처 광주시청 홈페이지

이런 배움에는 인생이 없다. 적응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욕구를 돌보지 않고 어른들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으면, 엄청나게 역할을 잘하는 ‘기능인’은 될 수 있어도 나만의 독창적인 자아는 사라진다. 사회는 개인에게 더 빨리 ‘효능감 있는 인간’이 되라고 요청한다. 개인 스스로가 기업이 되어 자신을 관리·경영해 더 나은 성과를 내보라고 한다. 자신의 자아를 경영의 대상으로 삼으니 내면의 자원이 고갈된다. 피로 사회를 특징짓는 끝없는 피로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가르침의 목소리만 남은 사회를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페다고지 사회’라고 부른다. 페다고지 사회에서는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배워 익힐 수 없다. ‘주어진 배움’만 있기 때문이다. 주체는 상실되고, 배움은 잘 다듬어진 상품이 된다. 인간은 기억 가능한 존재보다 계산 가능한 존재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국가는 모든 공간과 시간을 페다고지화해 국민을 영혼 없이 계속해서 배우는 상태에 묶어두고자 한다. 배움의 본질은 상실되고 본래적 교육은 사라진다.

평생학습(lifelong learning)은 학교에 독점되어 잃어버렸던 배움의 에너지를 다시 찾고자 하는 운동이자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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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배움 에너지를 찾을 수 있을까

배움의 상실은 경기 침체나 환경문제에 비해 큰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공부하려는 사람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지구적인 환경문제를 누가 만들었는가? 왜 이 문제는 지속되는가? 경제력은 어떤 가치보다도 우월해 보이지만 행복지수와는 별 관련이 없다는 데도 왜 사람들은 돈에 집착하는가? 이런 모순적인 현실은 사실 사회 구성원들의 배움 생태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일상적으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가치와 규범을 어떻게 배우는지를 빼놓고는 지구적 위기에 대해 논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개념이 ‘평생학습(lifelong learning)’이다. 평생학습은 학교에 독점되어 잃어버렸던 배움의 에너지를 다시 찾고자 하는 운동이자 관점이다. 페다고지화한 평생교육 사회가 아니라 잃어버린 배움의 에너지를 되찾는 평생학습 사회를 형성해 나아가는 과정만이 지구적·개인적 모순을 부분적으로라도 해결해나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나 OECD가 모두 평생학습에 대한 정책 보고서를 내고 지구적 사업을 전개하는 이유는, 소외된 나라·계급·계층에게 배울 권리를 부여하고 상처받은 개인들이 자기 치유를 통해 내면적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빼고는 어떤 개혁이나 혁신도 성공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왜 나라가 발전해야 하는가? 국민 모두가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 서다. 쾌적한 상태를 누리면 그것이 행복인가? 아니다. 독일의 실험 물리학자 엘스터(Elster)가 말한 대로 약물중독과 같은 단편적 쾌락은 학습과 같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즐거움을 넘어서지 못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깨달을 때 가장 행복한 ‘의미의 존재’다.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사람, 공동체 속에서 앎을 나누는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하다.

정책은 사람들의 정향(orientation)을 형성하는 일종의 틀이다. 둑을 세워 물을 흘려보내듯, 정책을 세워 국민의 행복이 흘러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국가 정책이다. 그렇다면 정책의 중심에서 평생학습이 누락되어서는 안 된다. 왜 모든 정책은 ‘효과성’과 ‘효율성’이라는 경제·경영학적 용어로 평가 받으면서, ‘성찰성’이나 ‘학습력’과 같은 교육학적 용어로는 검토되지 않는가? 심지어 학교 현장에서조차 수월성 지표를 벗어나 아이들의 성장을 충분히 반영하는 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육적 실재감’이라는 말이 있다. 매개된 상호작용에서 행위자들이 가지게 되는 대면 관계와의 유사한 느낌을 ‘사회적 실재감’이라고 부르는 데서 착안한 용어로, 원격 상황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가리킨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융합될 때 교육자와 학습자는 다른 곳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몰입을 경험한다. 내면의 성장과 자아의 확장이 교육 내용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그 느낌이 의외의 장면에서 이루어질 때 ‘교육적 실재감’이 있다고 칭한다.

특정 사건에 관해 토론하거나, 드라마에 관해 대화할 때, 함께 그림을 그릴 때, 우리는 몰입과 융합, 성장과 확장을 경험한다. 교육적 실재감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평생학습은 그런 순간을 계속 넓혀가자는 제안이다. 매개가 책이든 뜨개질이든 운동이든 카메라든, 삶을 배움으로 읽어내는 능력을 익히자는 것이다. 사회가 평생학습을 축으로 움직일 때 경쟁이나 성과에 대한 집착은 줄어들게 되어 있다. 평생학습의 실재감은 타인의 도움을 전제로 하고, 함께 의미를 만들어나갈 때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국제 기구들이 평생학습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 정책은 관점의 선택이다.

출처 게티이미지코리아

평생학습의 코드 만들기

우리 사회에서 평생학습이 갈 길은 너무나 멀다. 외국의 사례나 국제 기구의 주장이 아무리 선명해도 우리의 경험과 맞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표현이 어렵지 않고 배움이 삶과 결합된 나라들과 우리는 시작점이 전혀 다르다.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5세 무렵부터 ‘소식 나누기’를 시작 한다. 모르는 것은 그저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 무능하다는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 언제나 원하면 배움을 시작할 수 있다는 상식이 교육제도에 붙박여 있다. 우리는 어떤가? ‘억울하면 출세하라’, ‘수능 점수가 배우자의 얼굴을 바꾼다’, ‘대학 순위에 따른 차별은 당연하다’, ‘정규직 하고 싶으면 공채 봐라’와 같은 시험 결정론에 익숙하다. 대학도 수능도 공채 시험도 자격증도 아닌 평생학습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대학과 학교가 교육의 중심축이라면, 자격증이나 기타 방계 학제들은 교육의 주변부를 형성한다. 주변부에도 진입하지 못한 ‘관심 제외 지역’에 평생학습이 위치한다. 평생학습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취미 교양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며 알아서 하면 좋지만 언제든 없애도 되는 정책 영역에 해당한다. 그래서 평생학습에 대한 예산은 교육부 예산의 0.08%로, 다른 부처의 평생학습 관련 예산에도 미치지 못한다. 평생교육 전문가들도 공공적 차원에서 배치되지 않는다. 평생학습은 학력의 위계에 따라 사회적 관심의 변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간 평생학습 운동이 이루어낸 성과는 적지 않다. 꽃꽂이나 생활체육 정도로 여겨지던 평생학습은 주민센터로 들어가고 ‘러닝랩 (Learning Lab)’으로 나아갔다. 시민들의 학습공동체가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학습자 누구나 강사가 되어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문해 교육이 확장되고 지역 통합적 다문화 교육이 등장하였다. 평생교육 바우처 제도가 시행되어 소외 계층의 학습 기회가 실질적으로 확보되었다. 지역의 만족도가 평생교육과 연결되자 전국 226개 기초자치단체의 73.9%인 175개 도시가 평생학습 도시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성과가 가능했을까? 평생학습 예산은 없었지만 사람들 사이에 배움에 대한 열렬한 에너지가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100세 시대를 대비하는 일은 결국 자신의 삶을 성장시키는 것임을 알고 있었고, 평생학습을 통해 그 성장을 이루었다. 새로운 언어나 새로운 영역을 공부하는 일은 물론이고, 그간 직업적으로 익힌 전문성을 교육을 통해 나누기도 했고, 마을에 학습 공동체를 만들어 지역의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도 했다. 배움을 가르침의 종속변수 정도로 생각하면 일상이나 자신을 배움의 주체로 보지 못한다. 평생학습이 자기 인생의 목소리를 바로 세우는 배움임을 알게 되면서 이들은 이 운동의 선두 주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평생학습을 통해 배움의 즐거움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평생학습 운동을 하게 되어 있다. 이런 자발적 학습 운동이 바로 자치력의 기반이다.

가르침에 종속된 배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선언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르침과 분리된 배움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배움은 쉽지 않다. 배움의 독립이 우리 일상의 문법이 되려면 일종의 혁명을 거쳐야 한다. 이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선언이 사회적 상식이 되기 위해 혁명을 거쳐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시대에서 혁명은 별게 아니다. 어릴 적부터 우리 몸에 각인되어온 학교에서의 배움 관행에서 벗어나 나-우리-사회의 문화 코드를 전복하는 일이 그것이다. 우리 몸에 오랜 세월 새겨 넣어진 습(習)을 바꾸는 일, 예컨대 속도에 집착하지 않고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경쟁에 목매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이런 변화는 혁명이다. 일상적이지만 근본적 이고, 사소해 보여도 구조적이기 때문이다. 나-우리-사회의 촘촘한 정서의 망을 바꾸는 변혁을 할 때 배움의 기쁨이 생겨날 수 있다.

출처 수원시 평생학습관 홈페이지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원래 싱싱했던 배움을 막아두 었던 너무나 많은 당위나 규칙, 제도의 볼트와 너트를 제거해주면 된다. 조금씩 변경하여 물길을 바꾸는 일종의 너지(nudge) 같은 정책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학교식 배움만을 배움으로 보는 관행을 바꾸는 일도, 평가에 정성적 영역을 시스템적으로 도입하는 일도, 기관의 자율성을 좀 더 보장 하는 일도 거기에 해당한다. 법이나 경제의 논리가 아니라 학습의 코드로 사회를 재평가할 수 있도록 배움을 위한 지원 체제를 정비하자는 얘기다.

또 하나, 지금까지의 배움 문화를 바꾸기 위해 부모와 교사인 우리 어른 들이 새롭게 학습하는 것이다. 배움을 기피하는 50대가 20대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가르칠 수는 없다. 그렇게 강조해도 아이들이 자기 주도 학습이나 협동 학습을 못 하는 이유는 부모나 교사가 그런 학습을 즐겨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부모나 교사의 지시를) 들은 대로 하지 않는다. (부모나 교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본 대로 행한다. 멈추고 쉬고 생각하고 성찰하는 문화를 어른들이 먼저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평생학습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정책과 사회 전체를 학습 조직, 학습 공동체로 재편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스스로 안전을 지켜내고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 고민한 것처럼 삶의 문제를 대화하고 토론하는 공론장이 실제로 이미 가정에, 일터에, 학교에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것을 아이들 교육의 맥락에서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지, 제도와 정책이 어떻게 지원할지가 문제일 뿐이다.

우리 사회가 평생학습 사회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거의 논의되지 않았던 공동체나 집단의 학습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제도가 가르치고 개인이 배우는 시대는 끝났다. 개인이 자기 계발을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착취하는 학습과도 결별해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공동체가 ‘더불어 배움’을 시작해야 하는 시기다. 서로의 배움을 자극하고 촉진하여 지구적 문제를 공유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 가는 해법일 것이다. 지구적 문제는 개인 생존의 문제이고, 개인은 타인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배움의 과정에서 문제 해결의 주체로 거듭난다. 평생학습에는 ‘더불어’의 고리를 만들어왔던 역사가 있다. 어떻게 어디서 시작할 것인지만 정하면 된다. 새로운 배움의 조건, 그것은 수월성 강박을 벗어나 배움 본능의 에너지를 회복하는 일, 즉 평생학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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