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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안보 국가 어젠다와 중견 국가 외교 정책의 창

인간안보의 국가 어젠다 설정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10일 취임 3주년 특별 연설에서 “오늘날의 안보는 전통적인 군사안보에서 재난, 질병, 환경문제 등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요인에 대처하는 ‘인간안보(Human Security)’로 확장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동북아와 아세안, 전 세계가 연대와 협력으로 인간안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며, 남과 북도 인간안보에 협력하여 생명 공동체와 평화 공동체로 나아가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인간 안보를 국가 어젠다로 설정한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입에서 인간안보 라는 말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고 그 톤은 안보 패러다임 전환의 한 획을 그으려는 듯 사뭇 비장했다.

국내 언론은 인간안보라는 화두가 ‘갑작스럽게 툭 튀어나온 것’이라며 그 배경을 추적했다. 학계는 인간안보 본래의 개념과 구현 프로세스에 대해 사전에 충분한 연구에 기반한 것인지, 현재의 외교·안보적 맥락과 우리가 처한 상황에 부합하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당시 인간안보와 관련한 뚜렷한 공론이 없었다는 점에서 정부 외부에서 그 의제 설정을 주도했을 리는 없다. 외교부와 통일부 등 기존의 정책 시스템 내에서 논의가 진행되어온 흔적도 없었다. 결국은 대통령이 공공의 시스템적 의제로 확장하여 동원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인간안보의 국가 의제 설정 과정은 1984년 존 킹던(John Kingdon)이 창시한 다중흐름모형(Multiple Streams Framework)으로 살펴보면 더 명료 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등장한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 개념은 국가를 위해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했다. 반면 1989년 12월 미·소 간 냉전 종식 선언은 안보의 개념과 대상을 국가에서 개인의 안위로 옮겨놓았고 인간의 존엄성에 그 초점이 모이게 하였다. 이후 인간안보 문제의 흐름이 줄곧 이어져왔다. 한편 유엔과 전문가 집단 등 정책 네트워크상에는 인간 안보 구현을 위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정책 대안의 흐름이 진전되었다. 그러다가 COVID-19(코로나19)라는 극적 사건이 촉발 기제가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K-방역’에 대한 대내외적 자신감과 남북 관계 교착의 좌절감이 혼재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이 세 가지 흐름을 결합하여 ‘인간안보와 국제 연대·협력’이라는 정책의 창을 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톱다운 식의 국가 어젠다가 지속성을 가지고 집행에 성공하여 정책 산출물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관료 집단과 공공의 반응이 우호적이어야 한다. 정책 시스템 내·외부에 정책 지지의 확장이 시작점이고 관건적인 것이다. 물론 관계 부처는 즉각 움직였다. 기존의 100대 국정과제의 실천 과제로서 인간안보를 구체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정책기획위원회는 심의 과정에 함께하고 있다. 통일부는 ‘한반도 신경제 구상 및 경제 통일 구현’ 국정과제의 실천 과제로 ‘인간안보 바탕의 남북 생명 공동체·평화 공동체 구현’을 신설했다. 남북 간에 보건, 방역, 산림 협력을 우선 추진할 복안이다. 외교부는 ‘국익을 증진하는 경제 외교 및 개발 협력 강화’ 국정과제 아래에 ‘인간안보 중심의 포스트 코로나 시대 국제 협력 주도’라는 실천 과제를 새로 두었다. 보건, 경제개발·협력, 환경 등 세 분야에 외교 자산과 인프라를 집중하기로 했다. 세부 과제를 망라하여 단계별 이행 계획을 수립한 데 이어 코로나19 대응을 포함한 보건 협력을 필두로 실행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관계 부처의 실천 과제를 살펴보면 기존 국정과제 중에서 인간 안보와 관련된 사안을 골라내 급하게 집대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당면한 위협 요인들은 비전통적이고 비전형적이지만 관료 집단의 대응은 여전히 전통적 안보의 사고 체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출발과 계획은 창대하나 끝과 결실은 아쉬움이 남는 관료주의 관성과 습관이 이번에도 되풀이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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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에서 인간안보의 진화와 국가 주권과의 관계 설정

인간안보 어젠다를 국제 관계에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의 진화와 함께 인간안보와 국가 주권과의 관계를 잘 따져봐야 한다. 그리해야 정부의 역할과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이혜정과 박지범이 2013년 발표한 논문 <인간안보: 국제규범의 창안, 변형과 확산>에서 이 부분을 짚어주고 있어 참고할 만하다.

인간안보의 개념은 유엔개발계획(UNDP)이 1994년 발표한 <인간개발 보고서(Human Development Report)>에서 체계적으로 정립했다. 대다수 사람의 불안전한 감정은 전쟁과 같은 대재앙이나 세계적 사건보다 일상 생활의 걱정에서 온다고 보고, 핵무기나 전쟁의 위협보다는 인간의 생활과 존엄성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즉 물리적 폭력과 군사적 위협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를 인정하면서도 빈곤이나 기아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want)에 우선순위를 부여했고 경제 안보를 중시했다. 또한 국가를 잠재적인 안보 위협으로 가정하고 안보 주체에서 국가를 배제했으며, 새로운 국제 체제나 기구 형성을 선호했다. 인간안보의 내재적 특성을 네 가지로 꼽기도 했다. 빈국과 부국을 가리지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 위협이 된다는 지구적 관심(universal concern), 상호의 존성(interdependent), 조기 예방(early prevention)의 용이, 그리고 사람 중심(people–centered)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안보 대상을 세계 인류로 상정하여 너무 광범하고 안보 영역이 경제, 식량, 보건, 환경, 개인, 공동체, 정치와 같이 인간 삶의 전 분야에 걸쳐 있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인간안보와 국가 주권이 양립 가능하다는 관점은 2001년 일본 외무성이 코피 아난(Kofi Annan) 당시 유엔사무총장과 협력해 설립한 ‘인간안보 위원회(CHS, Commission on Human Security)’ 활동에서 나타난다. 2003년 발간한 <인간안보의 현재(Human security now)> 보고서는 국가를 안보 위협의 주체인 동시에 안보 제공자로도 보았다. 국가 중심의 국제 체제하에서 인간안보 달성을 주장했다. 물리적 폭력과 군사력의 위협을 우선시하였으며, 위협을 잠재적 위협과 현실 위협으로 구분하고 현재의 위협에 주목하였다.

유네스코는 2008년 <인간안보: 접근과 도전(Human security: App -roaches and Challenges)>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인간안보의 목적을 개인과 사회, 국가,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으로 확장하였다. 민주주의와 교육을 강조했으며, 저개발국의 국민 중 취약 계층을 겨냥했다. 국가의 역할은 ‘인간 안보위원회’의 경우와 같이 양면적으로 보았다. 인간안보를 국가 주권 실현을 위한 의제로 인식하는 한편 국제사회의 참여를 도출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2010년과 2012년 당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인간안보에 관한 사무총장 보고서(Human security: Report of the Secretary-General)>에서 인간안보의 정의, 국가 주권과의 관계, 그리고 보호 책무를 다루었다. 인간안보와 국가 주권을 상호 보완적으로 보았으며, 그 실천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인간안보를 국가안보의 보완재로 인식하고 국가 행위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인간안보를 국제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각국 내정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견지했으며, 공여국인 선진국과 수원국인 저개발국 간의 갈등 요소 제거와 가치의 조화에 방점을 두었다. 인간답게 살 자유를 추구하여 해당 지역에 적합한 인간 중심적이고 종합적, 포괄적인 접근법을 취했다(이혜정·박지범, 2013, 14~19쪽). 유엔인간안보 기금(UNTFHS, UN Trust Fund for Human Security)이 현장 기반의 각종 인간안보 적용 프로그램에 금융 자원을 대는 역할을 해왔음을 인정하였으며, 유엔 회원국에게 재정적 지원을 권고하였다. 유엔이 주도한 이런 노력이 축적된 끝에 유엔총회는 2012년 9월 10일 인간안보에 관한 공동의 이해를 담은 최초의 총회 결의안(General Assembly Resolution 66/290)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출처 UNTFHS

캐나다와 일본의 외교 적용 사례

그렇다면 인간안보가 현실 외교에서는 어떻게 작동할까? 캐나다와 일본은 우리보다 몇 발짝 앞서 외교 무대에서 인간안보를 실행했다. 데이비드 보솔드 (David Bosold)와 자샤 베르테스(Sascha Werthes)가 2005년에 발표한 <인간안보의 실제: 캐나다와 일본의 경험(Human Security in Practice: Canadian and Japanese Experiences)> 연구 결과가 흥미롭다.

먼저 캐나다가 중진국 외교에 인간안보 개념을 적용한 사례가 와닿는다. 인간안보를 외교 의제화하는 데는 1997년 외무부 장관 로이드 액스워디 (Lloyd Axworthy)의 역할이 컸다. 그는 비전통적 방식과 보텀업 형식을 적용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가 캐나다의 전통과 정치적 입지에 적합하며 더 실현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인간안보를 비교적 좁게 해석하여 통제되지 않는 군사력의 사용을 개인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보았다. 더 나아가 군사적 위협의 부재 그 이상으로도 보아 경제적 궁핍과 삶의 질, 기본 인권 보장을 포함했다. 다만 ‘다 보장하는 것은 아무것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인식 아래 다양한 인간안보 어젠다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선택의 문제, 정책 선호의 문제로 접근했다. 타국의 인간안보에 대한 불개입 원칙을 준수하면서도 국가권력을 극단적으로 남용하는 경우까지 국가 주권을 인정할 수는 없다면서 인도적 차원에서는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두었다. 2000년에는 ‘개입과 국가 주권에 관한 국제위원회(ICISS, International Commission on Intervention and State Sovereignty)’를 창설하였고, 2001년에는 <보호의 책임(The Responsibility to Protect)> 보고서에서 인도적 개입의 개념을 논했다.

캐나다는 다자주의 및 중견 국가·시민사회와의 연대라는 투 트랙으로 나갔다. 대인지뢰 금지, 소형 무기 및 위험 물품의 교역 축소, 성적 학대 및 노동·폭력으로부터 어린이 보호, 유고와 르완다를 위한 국제형사재판소 창설 지원 등 구체적인 정책 이니셔티브를 다자포럼에 상정했다. 개발 지원과 경제개발 촉진을 위한 규칙 기반 무역의 신장 편에 섰다. 대인지뢰를 금지하자는 국제 캠페인인 오타와 프로세스와 ‘오타와 협약(Ottawa Treaty, 대인 지뢰 금지 협약)’은 가장 중요한 성과이다. 이 캠페인은 1996~1997년 캐나다 오타와, 오스트리아 빈, 독일 본, 벨기에 브뤼셀, 노르웨이 오슬로를 돌면서 다양한 지역적 콘퍼런스와 실행력 있는 포럼을 거쳐 1997년 12월 122개국이 오타와에 모여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정점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뜻이 맞는(likely minded) 국가들 및 학계를 포함한 시민사회와의 연합 형성에 주력하여 인간안보의 국제 네트워크화, 제도화에 힘썼다. 1999년 오스트리아, 노르웨이와 함께 대인지뢰의 국제적 금지를 위한 ‘인간안보 네트워크(HSN, Human Security Network)’를 설립하였다. 유엔과 학계, 시민사회와의 협력 아래 국가 및 국제적 정책으로서 인간안보 개념을 촉진하였다. 2004년 5월부터 1년간 ‘인간안보 네트워크’ 의장국을 맡기도 했다. 캐나다는 초국가 NGO들, 제3 세계 국가 및 벨기에·스웨덴과 같은 EU의 중소, 중견 국가들과의 교류에 치중하였고 일본과의 협력도 도출해갔다.

출처 외교부 홈페이지

일본이 유엔과 협력하여 국제사회에 인간안보 개념을 확장해간 사례는 캐나다의 방식과 대비된다. 일본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경제개발과 기본적인 인간 요구에 대한 부응을 강조하였다. 공적 개발원조(ODA)가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고, 철저하게 유엔과 협력했다. 지역적으로는 남동아시아와 아프리카를 겨냥했으며, 다자주의를 지향했다. 인간안보 개념의 모호함과 광범함이 걸림돌로 작용한 측면이 있으나 용어의 확장성은 역설적으로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 간에 관계를 형성하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

또한 일본의 경우 총리가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주도해가는 점에서는 톱다운 방식을 가미했다고 볼 수 있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유엔총회 연설에서 인간안보의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한 것이 그 시작이다. 첫째는 지구상 모든 시민의 인권 존중이며, 둘째는 가난·질병·무시·압제와 폭력으로부터의 보호를 거론했다. 인간 중심의 사회개발을 일본 ODA의 중점으로 선언했다. 1997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유엔총회 연설에서 “인류의 안보(Security Of Human Beings)”를 언급하여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관점을 승계했다. 아시아발 금융 위기를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높일 호기로 삼았다. 1998년에는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인간안보 개념을 촉진하고 나섰다. 역내 경제 위기를 틈타 역내 국가들의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훼손하거나 미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자국의 더 공격적이고 독립된 국제적 역할 확대를 도모했다. 국제 개발을 지원하고 환경문제, 마약 거래·인신 매매 등 초국경 범죄, 난민, 인권침해, 감염병, 테러리즘, 대인지뢰 금지 등의 문제에 천착했다. 1999년 유엔 및 유엔 산하의 각종 프로그램, 조직들과 더 긴밀하게 협력하여 ‘유엔인간안보기금’ 창설을 주도하였다. 2001년 설립한 ‘인간안보위원회’는 유엔 시스템 내에서 인간안보 개념을 적용하는 정책 형성과 집행의 운영적 도구로 발전해갔으며, 인간안보를 위협하는 요인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진작하였다.

캐나다와 일본의 인간안보 접근 방법을 비교 연구한 에릭 르마클(Éric Remacle, “Approaches to Human Security: Japan, Canada, and Europe in Comparative Perspective”, 2008)이 찾아낸 그 함의를 보면 인간안보는 오직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의해서 보장된다. 그에 따르면 다자주의로 가야하며, 국제 협력과 연대가 공통점이다. 그리고 중견 국가일지라도 비전통적, 보텀업 접근에서는 글로벌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함을 보여준다. 캐나다와 일본 모두 당시 G8 국가였고, 유엔안보리(UNSC) 상임이사국 정도의 위상은 아니었다. 따라서 제한된 범위와 빠른 국제 변화 속에서 주요 대미 동맹국들의 입지를 저해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국제 위상을 강화하고 국제적인 존재 가치를 차별화해간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캐나다는 뜻이 맞는 중견 국가, NGO, 소프트 파워와 미디어에 능한 시민사회와의 임시적인 연대가 특징이고 제도화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런데 일본은 유엔과 연계되고 따라서 제도화 수준이 높았다. 캐나다 방식은 잘 짜여 있고 더 쉽게 실현 가능한 중기 혹은 단기 전략으로서 더 잠재성이 있다. 반면 일본은 중장기적이다. 그렇지만 캐나다와 일본의 사례는 상호 모순적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며 교차점이 분명히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인간안보 어젠다는 중견 국가의 외교 지평을 열 기회의 창

우리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신자유주의 퇴조와 전 지구적 대고립과 단절을 목도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피해는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 안보, 군사안보 강국인 G7과 중국, 러시아에 집중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인간안보에 결정타를 가하면서 기성의 국제 질서를 흔들고 있는 모양새이다. 물론 백신 개발 여하에 따라 코로나19 사태 이전으로 일거에 복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코로나바이러스의 공습이 없더라도 글로벌 거버넌스의 변화는 진행형이었다.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조지 모델스키(1987)는 1850~2080년에 이르는 장주기(long cycle in World Politics) 연구를 통해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에서 민주적인 글로벌 거버넌스로 전이될 것을 예견했다. 글로벌 공공재를 하나의 국가가 생산하던 시대는 점차 지나가고, 집합적인 생산 시대가 온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 중견 국가의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중견 국가 담론을 뚜렷하게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동북아 역내를 관통하거나 글로벌한 슬로건조차 뚜렷한 것이 없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미·중 간의 전략적 패권 경쟁은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일희일비하기보다 장기적 로드맵을 가지고 선제적, 전문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미·중 간 선택 프레임에 대해서는 이슈별로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 원칙적 대응 기조를 견지해야 한다. 그러자면 아이디어만 가지고는 중견 국가 외교를 끌어갈 수 없다. 중견 국가들이 공존할 수 있는 자원을 동원하고 대안적 이니셔티브를 창안해야 한다. 거기에 우리 외교가 설 공간이 있다. 강대국도 어쩔 수 없는 카드를 만들어가야 중견 국가로의 자리매김이 비로소 가능하다. 비록 힘은 없어도 국제적 담론을 생산하고,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을 어떻게 네트워크화하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인간안보 어젠다는 중견 국가로서의 외교 지평을 열어갈 기회의 창이다. 그래서 지금 미·중 패권에 낀 약한 국가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중소 혹은 중견 국가들에게 선택과 행동 방책 결정의 ‘지표가 될 수 있는 국가(indicator)’라는 역할 정립이 중요하다.

동북아 역내의 다자 협의체를 주도하고 글로벌 다자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기조를 이어가야 한다. 국제 규범과 가치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다자적 규범의 출현에 ‘시동(initiator)’을 걸고, 협력과 연대를 ‘촉진(facilita -tor)’하며, 협력의 장소와 플랫폼을 ‘제공(convener)’해야 한다. ‘K-방역’의 전체 메커니즘을 시스템으로 정립하여 국제적으로 전파하는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꽤나 효과적인 외교 레버리지이다.

2020.9.3 화상회의로 개최된 G20 특별 외교장관회의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참석하였다.

혼자 힘으로는 버겁다. 일본과 캐나다의 인간안보 원용 사례가 시사하는 의미는 상당하다. 인간안보를 가지고 한·일 및 한·캐나다 간 중견 국가 외교와 파트너십을 확충해가야 한다.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포럼, 콘퍼런스 등 프로세스 진행에는 보텀업 방식이 유효하다. 일본의 예와 같이 유엔 등 국제기구를 십분 활용하는 방안은 현실적이다. 이 경우 대통령이나 외교부 장관의 유엔총회 연설을 잘 설계하여 국제적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월 22일 UN 총회 기조 연설에서 “북한을 포함해 중국과 일본·몽골·한국이 함께 참여하는 ‘동북아시아 방역·보건 협력체’를 국제사회에 제안”한 것은 그래서 그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11.26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미 지난 5월 12일 우리 외교부는 ‘유엔 보건안보 우호국 그룹’ 출범을 주도했다. 유엔 차원에서 연대와 협력을 기반으로 글로벌 감염병에 행동 지향적이고 적실하게 대응할 다자 협력 플랫폼의 역할을 기대한 데 따른 것이다. 이어 5월 15일에는 한·중·일 보건부 장관들이 코로나19 협력에 관한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보건 협력은 인간안보 외교의 좋은 출발 이다. 여기에 오는 11월 한·중·일 3국 정상회담과 한·러 수교 30년 등 양자 혹은 소규모 다자체를 가동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성사 여부가 불투명한 내년 도쿄 하계올림픽대회, 그리고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대회의 정상적인 개최 지지를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중·일의 협력과 연대는 경험적, 역사적으로 볼 때 내실을 기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경제적 이해 대립이 첨예하고 역사적 불신의 골이 너무 깊은 나머지 논쟁과 선언은 있되 실질과 실행은 없었다. 더욱이 진행 중인 미·중 패권 경쟁은 지금 블랙홀과 같다. 이런 측면에서 가치 외교, 규범 외교를 지향하는 EU 국가들로 눈길을 돌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북한과의 인간안보 협력을 빼놓을 수 없다. 코로나19 방역은 남북 관계를 풀어갈 협력의 숨통이 된다. 비정치적이고 인도적 관여로 가야 한다. 남북 모두 중앙정부가 나서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다면 지방정부나 NGO, 유엔 산하 국제기구를 앞세워 절제하는(low-key) 형식으로 갈 수 있다. 경기도는 지난 6월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소독약을 북측에 전달했다. 이어 7월에는 코로나19 공동 방역을 위한 진단 키트, 열화상 감지기 등에 대해 유엔 대북 제재 면제 승인과 통일부의 대북 물자 반출 승인을 받아 전달했다. 서울시도 6월 초 마스크, 손 소독제, 방역복 등을 북한에 지원하기 위해 유엔의 제재 면제 승인을 받은 바 있다. 당장은 작고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협력의 끈을 이어간다면 그것이 하나씩 쌓여 신뢰 관계가 구축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북한을 동북아 방역 협력에 합류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는 비군사적인 인간안보를 연결 고리로 하여 동북아의 다자 안보 프레임워크로 발전시키는 전략을 구사할 소중한 발판이 되는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자칫 일회성이 되고 말거나 타성에 빠질 정책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소기의 정책 산출물을 일구어낼 묘안이 있는가? 청와대와 관계 부처 장관들이 정책 혁신가답게 목표 의식을 분명히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다음 하위 정책 시스템인 통일부·외교부 등 관료들의 지속 가능한 목표 관리와 선택·집중의 실행력, 그리고 이행 메커니즘 전반에 대한 조망과 함께 현미경적 관찰을 바탕으로 한 정책기획위원회의 국정과제 점검 노력 등의 루틴 프로세스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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