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가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판결 이후 반전의 계기를 찾지 못하고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2020년 8월 현재 수출규제 조치는 아직 철회되지 않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GSOMIA·지소미아) 종료 문제도 절차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대립이 재연되고 있다. 일본은 수출규제 조치가 일제의 강제 동원 배상 소송 문제와는 별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난 8월 4일 공시송달 효력 발생을 전후로 보복 조치를 내비치며 현금화를 견제하는 것에서 일본 정부의 속내가 드러난다. 피고 기업인 일본제철은 압류결정에 불복하며 즉시항고에 나섰다. 이는 대법원 판결과 압류결정 등을 철저히 무시하던 일본제철이 한국 사법부의 절차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대법원 판결에 따른 압류 자산의 현금화 절차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즉시항고는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던 일본제철이
한국 사법부의 절차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법원은 즉시항고에 대해 ‘이유 없음’으로 판단하고 기존 사법보좌관 처분 인가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항고법원인 대구지법으로 사건이 송부돼 다시 재판이 진행될 예정이다. 여기에서 즉시항고 기각결정이 나오면 현금화 절차는 한 걸음 전진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제철이 즉시항고를 시도한 이상 재항고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며, 그럴 경우 다시 대법원에서 압류명령이 확정되기까지 2~3년의 시간이 더 소요될 수 있다. 이렇듯 압류명령이 법정 공방으로 접어들면 매각명령 결정도 난항이 예상 된다. 일본 외무성은 압류명령과 마찬가지로 매각명령 결정도 일본제철에 송달하지 않은 상태이며, 이 또한 공시송달로 효력을 발생시킨 다고 해도 일본제철은 다시 즉시항고와 재항고 등을 시도하며 시간을 끌 가능성이 있다. 현금화 과정에서 거쳐야 할 단계는 또 있다. 압류한 자산이 주식이기 때문에 주식 감정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 역시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한편 일본제철은 우리 사법 절차에 들어오는 행위를 통해 우리 사법부의 최종적 판단이 내려 지면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미 2015년 대법원 판결 당시 일본제철 간부가 “법률은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제철이 한국의 사법 절차에 따르고 있는 것은 그 결과에 대해서도 수용하겠 다는 것을 전제로 한 행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우리 법원에서 사법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일본 정부가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송 당사자가 집행 절차를 다투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대해 보복 조치를 취하는 것은 우리의 사법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법원에서 사법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일본 정부는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없다.
소송 당사자가 집행 절차를 다투고 있는데 일본 정부가 보복 조치를 취한다면
이는 우리의 사법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일본제철의 즉시항고로 일본 정부는 대법원 판결 문제에서 자연스럽게 한 발짝 물러서는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정부도 현금화 절차가 진행되어 보복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 부담이었을 것이다. 우선, 논리적으로 궁색하다. 공시송달이 효력을 발생한다고 해도 그것이 일본 기업에 ‘추가적으로’ 손해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이에 대해 추가 보복을 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지난해의 수출규제 조치 때도 대법원 판결과의 직접적 연관성을 부인해야 했던 일본이 대법원 판결 진행을 이유로 보복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일본 측이 수출규제 조치의 이유로 제기한 ‘안전 보장상의 문제들’에 대해 우리 정부가 충분히 의구심을 해소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일본은 이를 양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해야 할 일은 해당 조치를 철회하는 것뿐, 추가 조치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있는 것도 일본 정부에는 부담이다. 2019년 여름에는 올해 개최될 도쿄올림픽 특수를 기대하며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가 혹시라도 일본 경제에 손실을 가져온다 해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20년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올림픽 특수는 사라졌고, 장기적 경기 침체가 우려되는 상황 이다. 이런 가운데 추가 보복이 초래할 한일 경제 관계의 단절은 일본 경제에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나아가 일본이 한국에 전가보도(傳家寶刀) 처럼 사용하는 ‘국제법 위반’론도 국제사회에 나가면 하나의 주장에 불과해 일본 입장에서 확전(擴戰)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일본은 불법적 식민지 지배에 기인한 피해 배상을 명령한 우리 대법원의 판결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반한다며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난하고 우리 정부에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은 한일 청구권 협정과는 무관한 것으로, 일본 정부의 주장은 비약이 심하다고 하겠다. 나아가 이러한 주장은 1965년 한일 기본 조약 체결 시 ‘한일병합조약’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는 한국 측 주장을 암묵적으로 수용하여 ‘합의할 수 없음에 합의’하는 방식으로 식민지 지배가 불법이라는 우리 측 해석을 묵인해온 관습법으로서 ‘1965년 체제’를 일본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한국 대법원이 자국 헌법에 근거해 한일 청구권 협정에 위반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일본 측 논리는 일본 학계에서조차 통용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개인 청구권을 국가가 소멸시킬 수 없다는 인권의 기본 원칙에 입각해 일본 정부의 행동을 비판하는 일본의 이른바 양심적 법조인들을 차치해도, 조약과 헌법에 관한 일본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에서 볼 때 일본 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세계의 여느 국제법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국제법 교과서들도 조약과 국내법, 조약과 헌법의 관계에서 조약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양자 사이의 이원론, 국내법 우위의 일원론 등이 함께 경합하고 있다고 하여 여러 학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일본 학계에서는 헌법학자들을 중심으로 헌법의 우위를 주장하는 학설이 강력히 존재한다. 이는 전후 헌법의 평화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헌법에 대해 조약 우위설을 인정할 경우, 법률 보다 간단한 절차로 성립하는 조약에 의해 헌법이 개정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에 이는 국민주권과 경성헌법의 취지에 반한다는 것이 그 근거다.
일본 사법부가 헌법의 우위를 인정하고 조약을 해석한 사례로 ‘스나가와 소송’이 있다. 이는 1957년 7월 도쿄도 스나가와의 미군 비행장 확장 반대 운동 과정에서 기지에 난입한 시위대에 대한 유무죄를 판단한 사건이다. 하급심에서는 미일안보조약에 의한 미군 주둔이 헌법 정신에 반하며, 미일행정협정에 의거한 형사 특별법도 헌법에 위반하여 무효이기 때문에 시위대의 피고들이 무죄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일본 최고재판소는 이를 뒤집어 피고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 논리는 미일안보조약이 위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피고의 유무죄가 아니라 그 판단의 근거로 동원된 논리다. 즉 헌법 우위론에 입각해 미일안보조약이 이에 위배되느냐, 위배되지 않느냐가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국제법 위반론의 시비를 판단할 참고 사례로 고카료(光 華寮) 사건이 있다. 고카료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교토대학이 민간 소유자로부터 임차해 중국인 유학생 기숙사로 사용하던 부동산이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던 중국인 학생들이 이곳을 점거하자 중화민국 정부가 이들의 퇴거를 요구하며 일으킨 소송이다. 그런데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로 일본이 중화민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대표 정부로 인정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고카료의 소유권 이전 문제와 더불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외교 관계가 단절된 중화민국이 일본 법정에서 소송 당사자 자격을 갖는지 여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 사법부는 소송 과정에서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서 일본 법정에서 소송 당사자 자격을 갖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즉 조약과 국내법 사이에서 일본 사법부는 부분적으로 국내법이 우위에 있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일본 사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존중하면서도, 중화민국에 일정한 실체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입각해 ‘정치는 사법에 개입할 수 없다’고 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측에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 사법부가 국내법에 대한 조약의 무조건적인 우위를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일본 정부도 이를 존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법은 이러한 여지를 허용하고 있다. 즉 국제법은 국내법에 대해 일방적으로 우위를 주장해 국내법을 부정하는 법체계가 아닌 것이다. 그 때문에 정부 간 조정이 필요하며 여기에서 한일 양국 정부의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에 우리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일본에 대화를 요구하며 조정을 시도해왔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국제법은 국내법에 대해 일방적으로 우위를 주장해
국내법을 부정하는 법체계가 아니다.
그 때문에 정부 간 조정이 필요하며 여기에서 한일 양국 정부의 역할이 주어진다.
“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며 피해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원만한 해결 방안을 일본 정부와 협의해왔고 지금도 협의의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습니다.” 2020년 8월 15일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우리 정부의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이 문장을 앞뒤에서 받치고 있는 원칙이 ‘개인의 존엄’이다. 대통령은 강제징용 문제를 언급하기에 앞서 ‘자신의 존엄을 증명하고자 하는 개인의 노력’에 ‘반드시 응답’해야 할 국가의 책무를 언급했다. 이는 일본제철이 철저히 저항할 자세를 보이는 가운데 피해자들이 고령인 사실을 고려하면 사법적 절차로만 문제가 해결될 수 없으며, 개인의 존엄을 위해 국가가 응답할 책무가 있음을 확인한 것으로 읽힌다.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인 노동자의 강제노동 사실을 확인하고 실질적 구제로 화해가 성립된 니시마쓰건설 소송이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도 1990년대 이후 이른바 ‘민간 배상’, 즉 우리가 말하는 개인 배상청구권 문제가 부상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련의 중국인 강제 연행 및 위안부 피해 소송 등에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가 중일공동선언에 의해 포기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의 판결이 제시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의 입장은 “1972년의 중일공동선언으로 정부가 외교적 보호권을 가지고 일본 측에 요구할 권리는 중국 측이 포기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개인 청구권 자체에 대해서는 소멸하지 않았으되 청구권에 기초한 청구에 대응할 법률상의 의무가 소멸했다는 의미에서 ‘구제되지 않는 권리’라고 설명했다.
결국 2007년 4월 니시마쓰건설 소송에 대해 일본 최고재판소는 “중일공동선언에 의거하여 개인 청구권은 실체적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도 “재판을 통해 실현할 수 없다”는 판단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청구권의 포기는 재판상의 권능을 소멸시킨 데 머무르는 것으로, 최고재판소는 “강제노동 사실을 인정 하고, 니시마쓰건설이 피해자들의 피해 구제를 위해 노력할 것이 기대된다”고 하여 자발적으로 배상을 실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중국 정부는 일본 최고재판소가 중일공동성명에 대해 내린 해석을 “위법한 것으로, 무효”라고 비난 하고 일본 정부에 적절한 처리를 요구했다. 그 이후 2009년 10월과 2010년 4월, 도쿄 간이 재판소에서 화해가 성립되어 니시마쓰건설은 강제 연행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였다. 그리고 2009년에 2억 5,000만 엔, 2010년에 1억 2,800만 엔을 중국 민간단체에 신탁하여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과 위령비 건설 비용으로 충당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강제징용 문제를 언급하기에 앞서
‘자신의 존엄을 증명하고자 하는 개인의 노력’에
‘반드시 응답’해야 할 국가의 책무를 언급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일본 최고재판소가 중국인의 강제노동 사실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니시마쓰건설이 피해 구제를 위해 노력할 것이 기대된다”고 권고한 것이다. 즉 국가 간 조약과 별개로 ‘가해-피해 사실’이 인정된다면 당사자는 실질적 구제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정부는 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중일 관계와 한일 관계의 법적 구조와 그 경위가 다른 점이 있다고 해도 피해자 구제의 기본 원칙에 입각하면 풀지 못할 일이 없다.
그동안 일본 정부 뒤에 숨어 있던 일본제철이 즉시항고를 결정했다는 것은, 그 의도 여하에 관계없이 한국 사법부의 절차 안에서 피해자와 직접 마주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일본 정부가 피고 기업에 걸어놓은 빗장의 한쪽 끝이 풀어진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듯하다. 일본제철의 즉시항고는 우리 정부에 개인의 권리가 실현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대일 외교를 전개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