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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칼럼Ⅰ
수사권 다원화와 형사사법개혁의
새로운 비전
이국운 (정책기획위원회 국민주권분과위원 / 한동대학교 법학부 교수)
검찰이 모든 권한을 독점하는 기존의 형사사법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해 수사권의 다원화가 논의되고 있다. 수사권 다원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신속한 조정 능력과 뚜렷한 목표, 유능한 인력의 충원 등이 필요하다. 지난날 시도했었던 형사사법개혁의 내용들을 살펴본다. 또한 문재인 정부의 형사사법개혁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검토하고, 어떤 비전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하는지 알아본다.
2021년은
수사권 다원화의 원년
2021년은 대한민국 형사사법 시스템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해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출범 및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으로 종래 검찰이 모든 수사를 지휘하고 종결하며, 기소와 불기소를 독점적으로 결정하던 독점체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법무부의 탈검찰화와 검찰인사제도의 정비, 국가수사본부의 설치 및 자치경찰제의 시행, 인권 치안 행정의 확립과 정보경찰의 개혁 그리고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 이관 등 문재인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형사사법개혁의 의제들은 그밖에도 여럿이다. 하지만 형사사법시스템의 근간에 관해서는 수사권 다원체제의 태동이 가장 결정적이다.
형사사법개혁의
비전 문제
수사권 다원화는 형사사법개혁의 방향에 관하여 새로운 비전을 요청한다. 수사권 일원체제에서 형사사법시스템의 운영 책임은 당연히 검찰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수사권 다원체제에서는 그와 같은 단순 논리가 통용되지 않는다. 검찰은 기본적으로 영장청구권과 기소권, 공소유지권을 통해 다원화된 수사기구들을 견제하고 통제하는 본연의 역할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다원화된 수사기구와 그 감독기관들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책임을 부담해야만 한다. 나아가 국민의 선택을 받아 집권하는 동안 정부를 운영하는 정치세력은 형사사법시스템의 운영 책임을 최종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과거처럼 검찰의 권력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검찰이 모든 권한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종래의 형사사법시스템에 비교할 때, 수사권 다원체제는 훨씬 운영하기 어려운 체제이다. 더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고, 더 섬세한 시스템을 구축하며, 더 유능한 인력을 충원하고, 더 신속한 조정 능력을 발휘해야만 다원체제는 비로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요청의 전제는 형사사법의 개혁을 이끄는 새로운 비전이다. 지금 우리는 이 비전을 과연 가지고 있는가?
국가주의 개혁시도와
그 좌절
흥미롭게도 형사사법의 모든 권한을 검찰이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종래의 체제 역시 일정한 개혁 비전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체제의 설계자라고 할 수 있는 해방공간의 이인 검찰총장 등은 식민지 형사사법기구의 국가주의적 개혁을 지향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식민지 형사사법기구는 자의성, 폭력성과 더불어 신분제적 성격과 부패 친화성을 체화했고, 해방 당시 그 관성은 식민지 경찰 권력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이인 등은 검찰을 구성하는 150명 남짓의 법률가들을 형사사법시스템의 중추로 삼아 식민지 경찰 권력의 잔재를 통제하고자 시도했다. 물론 여기에는 식민지 시대 말기 총동원체제에서 일제가 추진했던 형사사법의 검찰 중추론이 미군정의 묵인 아래 슬그머니 부활한 측면도 있었다.
국가수사본부 현판식(2021.01.04)
*출처 : 경찰청
그러나 이와 같은 국가주의 개혁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남북의 이념대결과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군 관련 수사기구와 정보기구들이 과대하게 팽창했고, 1961년 이후 시작된 군사정권은 이를 더욱 노골적으로 추진하여 아예 정보기구들을 통치의 주축으로 삼기까지 했다. 이에 대하여 검찰은 군사정권에 맞서 저항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적응하는 경로를 보였다. 사실 국가주의 형사사법시스템은 공명정대하고 청렴하며 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는 엘리트 법률가집단, 즉 법률가의 명예를 무엇보다 높이 내세우는 검찰조직 없이 존립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검찰은 국가주의 개혁의 첨병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민주화와 검찰의 강화
그리고 자유주의
개혁시도
이처럼 국가주의 개혁 시도가 좌절되는 과정에서 검찰조직 안팎에는 볼썽사나운 일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군사정권의 정권 연장 시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정치검사들이 등장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퇴직한 검찰 출신 전관 변호사가 단기간에 큰 수익을 확보하는 이른바 전관예우의 폐습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일탈이 구조화되는 국면에서 검찰은 민주화를 맞이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검찰은 군사정권을 방어했으나, 1987년 이후 군사정권 이전의 국가체제가 복원되자 곧바로 권력의 중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9년의 ‘범죄와의 전쟁’,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과거청산 수사와 재판, 역대 대통령의 가족과 측근 게이트, 주요 선거의 자금을 비롯한 각종 정치 비리, 주요 재벌 및 사회집단의 위법 의혹 등을 직접 수사하면서 검찰은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권력 중추가 되었다.
만약 이와 같은 권력 강화 과정에서 검찰이 스스로 정치검사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전관예우와 구조적으로 결별하는 등 국가주의 개혁에 매진했다면, 형사사법개혁은 지금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검찰은 정반대로 민주화 이후 두드러진 ‘정치의 사법화’, 특히 형사사법의 정치적 활용 추세를 역이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고, 이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특권의식과 부패에 연결된 다수의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심지어 검찰조직 내부의 정파적 균열이 여러 차례 대중 앞에 노골적으로 드러나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검찰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극도로 고조되자 종래의 국가주의 개혁을 대체할 새로운 비전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민주화 이후 30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형사사법의 재제도화를 선도해 온 개혁 비전은 단연 자유주의적 관점이었다.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실체적 진실 발견을 중요시하는 기존 논리에 비교할 때, 이 관점은 개인의 인권, 특히 ‘피의자·피고인의 인권 보호’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특징을 지닌다. 자유주의적 관점은 국가주의 개혁 노선에서 일탈한 대한민국 형사사법시스템의 문제점, 특히 식민지 시대부터 온존된 자의성, 폭력성, 신분제적 성격, 부패 친화성 등을 형사사법 권력의 행사 대상인 피의자·피고인의 시각에서 탁월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자유주의 관점은 동시에 취약점도 지닌다. 대표적으로 형사피해자에 대한 무관심과 배제, 법률가 중심의 형사사법운영, 공동체적 치유 역량의 상실, 바람직한 삶과 좋은 사회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의 약화 등이 손꼽히며, 결정적으로는 공권력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시종하는 까닭에 형사사법시스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에 불리한 측면이 있다.
문재인 정부의
형사사법개혁
문재인 정부의 형사사법개혁은 국가주의적 관점과 자유주의적 관점이 맞부딪히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현직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2016~2017년 촛불시위는 검찰에게 뿌리 깊은 국민적 불신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형사사법 권력을 행사하도록 용인했고, 이러한 흐름은 2017년 이후의 적폐청산 국면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른바 사법 농단 사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검찰은 오랫동안 사실상의 성역으로 여겨져 왔던 법원 내부의 인사 문제에 대해서까지 형사사법 권력을 행사했다. 흥미롭게도 문재인 정부의 형사사법개혁은 이처럼 검찰의 권력이 헌정 사상 최고조에 오른 시기에 정점에 다다랐다. 2019년 8월부터 2021년 4월의 기간 동안 한국 사회는 형사사법 시스템의 개혁 방향을 두고 법무부와 검찰의 수뇌부가 사사건건 맞부딪치는 모습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헌정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갈등의 한복판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출범 및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으로 앞서 말한 수사권 다원체제가 태동했다.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선진 수사기구로 출범하기 위한 공수처 설립방향’ 공청회가 열렸다(2020.06.25).
*출처 :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이 과정을 돌이켜 볼 때, 참으로 아쉬운 점은 검찰 주도의 적폐청산과 법무부 주도의 검찰개혁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형사사법개혁의 비전이 일관성을 가지고 제시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검찰을 국가주의 개혁의 주체로 확인하면서도 자유주의 개혁의 가치와 필요성을 충분히 인정하는 가운데, 그 취약점을 효과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이론적 비전이 공유되었다면, 문재인 정부의 형사사법개혁 작업은 훨씬 부드럽게 진행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형사사법개혁의 새로운 비전에 관한 요청은 문재인 정부의 성과인 수사권 다원체제에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 점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을 제시함으로써 두서없는 소고를 마무리해 보자.
공화주의
형사사법개혁론
우선 형사사법개혁의 이론적 비전에 관해서는 공화주의적 관점을 깊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공화주의에서 진정한 자유는 공공선을 향한 시민적 덕성의 발휘를 통해 가장 잘 실현될 수 있음을 전제하면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그리고 시민적 견제력의 확보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이 관점에서 형사사법의 참여자는 동등한 존중을 받을 자격을 가진 시민들이며, 형사사법의 목표는 피해자, 피의자, 피고인, 법률가들을 포함하여 시민 모두의 훼손된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며, 형사 절차는 악의 확인과 정의의 실현, 자유의 회복을 함께 경험하는 시민적 공동교육의 현장이다. 구체적으로 공화주의는 사회의 범죄율을 현저히 낮추고 훼손된 자유를 회복하는 시민적 역량을 높여 더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지향한다.
공화주의의 입장에서 수사권 다원체제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다원화된 수사기구를 효과적으로 관리, 감독, 통제할 새로운 거버넌스의 구축이며, 그 요체는 사실판단과 법률판단의 주체를 분리하는 것이다. 사실 수사권 다원화는 현대 사회에서 사실판단의 전문화 경향과 병행되는 현상으로서, 예컨대 의료, 군사, 조세, 금융, 노동, 지적 재산, 국제통상, 사이버, 방역 등 전문 영역은 이미 해당 분야의 사실판단에 정통한 전문가가 아니면 사실상 수사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오로지 법률판단의 전문성을 갖추었을 뿐인 검사에게 수사권을 일원화시켰던 종래의 체제는 이미 시대적 적합성을 상당 부분 잃었으며, 이른바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는 사실판단과 법률판단 각각의 합리성 증대라는 관점에서 정당화할 필요성이 크다. 한마디로 수사는 해당 영역의 전문 역량을 갖춘 수사관과 수사기구에 맡기고, 법률가는 형사 절차의 각 단계에서 법률판단을 기초로 이를 감독하고 통제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이처럼 전문 수사관과 법률가의 역할 분담을 기초로 수사권 다원체제의 새로운 거버넌스를 설계할 경우, 곧바로 등장하는 문제는 수사기구 전문화와 전문 수사 인력의 충원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면밀한 실태 조사를 거쳐 기존 수사기구의 전문성 강화로 충분한 분야와 별도의 전문수사기구를 육성해야 할 분야 그리고 광역지방자치단체의 자치경찰기구에 위임사무의 형식으로 이양할 분야를 슬기롭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수사기구의 총량을 늘리지 않는 범위에서 과감하게 기존 수사 인력을 재배치하고, 전문 수사 인력의 양성을 위한 시스템도 함께 구축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공정하고 인권 중심적인 형사 절차의 운영을 위하여 형사사법의 미시적 권력 균형을 확립하는 문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피의자, 피고인의 변호인은 물론 피해자의 변호인에게도 수사절차 참여권을 보장하고, 소위 전관예우의 근절을 위해 법조윤리의 차원에서 철저한 응징을 제도화해야 한다. 또 수사기구들의 권력 통제를 위해서는 기소배심(대배심)을 통해 일반 시민이 기소 과정에 개입하거나 각 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을 주민 직선으로 충원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형사 절차에서 성공보수약정 금지를 법제화하고, 형사 변론 비용의 공영화를 위해 법률사회보험제도를 검토할 필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