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낭비를
선택한다.”
내가 평생 자연을 관찰하며 얻은 또 하나의 소중한 깨달음이다. 자연에게는 계획이 없다. 다음 세대가 맞이할 환경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그에 걸맞게 자손의 형질과 규모를 기획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자연은 필요 이상으로 많이 생산한다. 민들레 한 송이에서 웬만한 잔디밭 하나쯤은 너끈히 석권할 수 있을 숫자의 씨앗이 날려 나온다. 대부분의 동물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자식을 낳는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이 태어난 차세대 주역들은 생존투쟁을 거치며 적자생존의 아픔을 겪는다. 그 과정이 바로 자연선택이다. 만일 자연이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하고 그에 알맞게 번식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은 생성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자연이 낭비를 선택한 덕택에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이 어마어마한 다양성이 만들어진 것이다. 자연은 절제와 기획보다는 낭비를 선택하고 자연선택에 발전의 책임을 떠맡겼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자연에서 자연스럽다고 해서 인간 사회에서도 자연스러워야 할 까닭은 없다. 엄청나게 많이 태어난 후 대다수는 끝내 자연선택의 형장에서 이슬처럼 사라지는 민들레 씨와 모기의 유충 장구벌레에게는 아직 마땅한 생존권이 부여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인권을 보장하기로 오래 전에 합의했다. 어떤 환경에서, 또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든 관계없이 인간에게는 모름지기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 즉 인권이 주어진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어느 누구도 자연선택의 횡포 따위에 낭비될 수는 없다. 미국 생태학자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은 일찍이 “생태학은 포괄적인 과학이고 경제학은 그것의 작은 전문 분야”라고 정의했다.
최근 들어서야 우리는 ‘따뜻한 자본주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이런 고민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고 뭉뚱그렸지만, 이제는 경제가 도덕을 제대로 품어야 한다. 경제적 인센티브는 선한 시민을 대체할 수 없다. 선한 시민이 선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새롭게 발굴하고 보듬어야 할 가치가 바로 ‘사회적 가치’다. 물은 동서로 나뉘지 않고 늘 섞여 함께 흐른다. 나는 그런 시민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라 부른다.
기후는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기후변화는 세계 모든 나라의 관심사가 되었고, 그 결과 1988년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라는 이름의 국제기구가 만들어졌다. 이 기구는 그 동안 네 차례에 걸쳐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세계 각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기후변화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에 입각하여 효율적인 정책을 수립하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금년 후반부에 발표할 제5차 보고서를 준비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분명 심각한 문제이지만 사실은 생물다양성의 고갈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다는 인식하에 2013년 유엔 산하에 IPBES(생물다양성과학기구)라는 새로운 국제기구가 탄생했다. 생물다양성과 생태계의 건강성이 우리 인류에게 어떤 혜택을 주는가를 과학적으로, 필요하다면 금전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개입으로 자연은 어느덧 장애를 입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자연의 상처를 보듬어야 지속 가능한 미래가 보장된다.
코로나19 사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자연의 역습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순전히 우리가 저지르고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꼴이다. 손씻기, 마스크 쓰기, 사회적 거리두기 등 ‘행동 백신(Behavior Vaccine)’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전하는 ‘생태 백신(Eco-Vaccine)’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팬데믹 한가운데에서 할 얘기는 아닐지 모르지만 바이러스는 결코 인류를 멸종시키지는 못한다. 충분히 많이 죽이고 나면 저절로 사회적 거리가 생겨 다음 사람에게 옮겨가지 못해 더 이상 죽이지 못한다. 그러나 기후 변화와 생물다양성의 고갈은 다르다. 우리 인류를 이 지구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다. 코로나19로 자연의 소중함을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면 이제 기후 위기를 벗어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전환은 ‘생태적 전환(Ecological Turn)’이다.
나는 최근 ‘일상회복지원위원회’ 공동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국내에서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발생한 지난해 1월 20일부터 어언 1년 9개월이 지났다. 우리 국민은 그동안 참으로 성실하게 정부의 방역 지침을 따르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덧 백신접종률이 세계 최고 수준에 다다르며 조심스레 일상으로 되돌아갈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시점에 ‘일상회복지원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만일 내가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더라면 위원회 명칭을 아마 ‘일상복원지원위원회’쯤으로 지었을 것 같다. 대놓고 ‘일상 회귀’라 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회복’이라는 단어에도 여전히 예전으로 되돌아가겠다는 희망과 의도가 담겨 있다. 팬데믹 상황이 안정되더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일상(New Normal)’을 얘기한다.
하지만 이 표현에는 예전의 일상이 정상적(Normal)이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예전의 우리 일상이 정상적이었으면 애당초 이런 끔찍한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뉴 노멀’은 실상 ‘새로운 비정상’, 즉 ‘뉴 애브노멀(New abnormal)’에 가깝다.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며 팬데믹을 견뎌내고 만들어낼 우리의 일상은 예전보다 훨씬 더 나은 일상이어야 한다.
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일상을 ‘뉴 업노멀(New upnormal)’이라 부른다. ‘Upnormal’은 내가 새로 만든 신조어로서 아직 세계 어떤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았다. ‘Abnormal’의 접두사 ‘ab-’와 상반된 접두사로 ‘up-’를 떠올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외래어 ‘업그레이드(upgrade)’를 생각하면 느낌이 올 것이다. 나는 ‘일상회복지원위원회’가 구현해낼 일상이 단순한 회복을 넘어 ‘뉴 업노멀’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