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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기획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배경
제성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2021년 11월 초부터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의 위기는 러시아군의 ‘비정상적 군사 활동’에 대한 잇따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러시아 고위 관리들의 일관된 침공 부인과 2022년 1월부터 시작된 러시아와 미국·NATO 간 협상에 따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른바 ‘돈바스(Donbass)’로 불리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상황 악화를 배경으로 2월 21일 지난 8년간 우크라이나 정부와 내전을 벌인 루간스크 인민공화국과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들과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2월 24일 돈바스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Demilitarization)’와 ‘비나치화(Denazification)’를 명목으로 내세우면서 동쪽, 북쪽, 남쪽에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 글을 집필하는 3월 초 기준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침공의 결과는 물론, 전격적으로 침공을 결정한 직접적 요인과 과정도 명확히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배경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미·러 갈등 :
얄타 트라우마와
몰타 트라우마
1989년 12월 지중해의 몰타에서 미·소 정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을 미국과 소련의 양대 영향권으로 나눈 얄타 체제의 해체, 이른바 ‘냉전의 종언’을 선언했다. 하지만 냉전 이후의 세계질서에 대해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전혀 다른 구상을 하고 있었다. 모스크바는 고르바초프의 ‘신사고(New Thinking)’에 따라 ‘냉전의 종언’을 선언한 주체로서 미국과의 건설적 협력에 기초한 ‘민주적 공동체’ 실현을 꿈꾸었다. 따라서 몰타회담 이후 소련은 독일 통일을 인정했으며,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맞서는 사회주의권의 군사동맹인 바르샤바조약기구도 해체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생각은 달랐다. 소련의 패배로 냉전이 끝났다고 보는 미국은 탈냉전기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소련과 공유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찾지 못했다. 따라서 미국은 베를린 장벽 너머 유럽 전체로 ‘민주적 가치’의 확산을 시도하면서, 자신 외에 그 어떠한 다른 패권국도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NATO는 해체가 아닌 확대의 길을 선택했고, 과거 사회주의권에 속했던 국가들은 차례로 NATO의 새로운 회원국이 되었다.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에 너무 많은 양보를 하면서 냉전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탈냉전기 러시아에 어떠한 양보도 해서는 안 된다는 ‘얄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반면 모스크바의 전략가들은 1989년 12월 몰타회담 이후 진행된 탈냉전의 결과가 결코 공정하지 못했다고 보는 ‘몰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양보는 미국이 ‘강요하는’ 세계질서에 대한 순응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미·러 갈등의 근본 원인은 ‘냉전의 종언’을 선언하던 바로 그 순간, 미국과 소련이 가지고 있던 냉전 이후 자신의 역할과 협력의 방식에 대한 다른 이해, 다시 말해 세계질서에 대한 서로 다른 구상에서 찾을 수 있다.
NATO 확대
미국은 1949년 4월 북미 및 서유럽 국가들과 NATO, 1955년 5월 소련은 동유럽 국가들과 바르샤바조약기구라는 군사동맹을 결성했고, 이 두 군사동맹은 과거 냉전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1990년 7월 바르샤바조약기구는 해체했지만, NATO는 1990년대 후반 체코, 헝가리, 폴란드, 2000년대 중반 불가리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는 물론, 과거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었던 발트 3국, 2000년대 후반 알바니아, 크로아티아를 새로운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며 회원국을 확대했다. 2008년 4월 부쿠레슈티 NATO 정상회의에서는 향후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가입이 합의되었고, 같은 해 12월 NATO 외무장관들은 두 나라의 회원자격 조건 충족 노력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하여, NATO는 북대서양조약 10조에 입각한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을 표방하면서, 회원국 확대가 어떤 국가에도 위협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유럽의 안정과 협력을 촉진하면서 평화, 민주주의, 공동가치로 통합되고 자유로운 유럽을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NATO 확대와 함께 미국 주도의 유럽 MD 체계 구축도 본격화되었다. 2010년 11월 리스본 NATO 정상회의에서 회원국을 탄도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집단방어를 위한 탄도미사일 방어 능력 개발이 결정되었고, 1년 반이 지난 2012년 5월 시카고 NATO 정상회의에서는 터키에 조기경보 레이더 기지 설치 등을 포함한 유럽 MD 체계 1단계 조치 완료가 선언되었다. 벨라루스, 몰도바, 우크라이나는 물론, 러시아의 역외영토인 칼리닌그라드주와 인접한 루마니아와 폴란드가 유럽 MD 체계 핵심 시설 배치에 동의하면서 러시아의 국경 인근까지 NATO 군사시설의 전진 배치는 기정사실화되었다.
러시아는 1990년대부터 NATO 확대에 반대했지만, 당시에는 러시아의 국력, 특히 군사력과 경제력이 회복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저지할 수 있는 능력도, 수단도 없었다. NATO는 1997년 5월 ‘러시아-NATO 상호관계·협력·안보 기본 협약’ 체결, 2002년 5월 NATO-러시아 이사회 설치 등을 통해 러시아의 반대를 무마하면서 NATO 확대와 유럽 MD 체계 구축을 강행했고 이로 인해 러시아의 안보 우려는 점점 더 커졌다.
러시아의
탈소비에트 지역통합
프로젝트
오늘날 러시아 세계전략의 핵심과제 중 하나는 탈소비에트 지역통합, 현 단계에서는 경제통합의 심화·확대이다. 2010년 7월 러시아·벨라루스·카자흐스탄 관세동맹(Customs Union) 출범, 2012년 1월 러시아·벨라루스·카자흐스탄 단일경제공간(Single Economic Space) 출범과 이를 관리하는 상설기관으로서 2012년 2월 유라시아 경제위원회(Eurasian Economic Commission) 설립 등을 통해 러시아는 경제통합을 중심으로 탈소비에트 지역통합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어서 2015년 1월 1일 러시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의 참여로 회원국 영토에서 상품·서비스·자본·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고, 에너지·산업·농업·교통 분야 등에서 회원국 간 조정된 정책이 실현되는 유라시아 경제연합(Eurasian Economic Union)이 출범했다. 이어서 1월 2일 아르메니아, 8월 12일 키르기스스탄이 가입 절차를 완료하면서 회원국도 5개로 늘어났다.
그런데 이러한 탈소비에트 지역통합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의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첫째, 문명적 차원에서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는 러시아 최초의 국가인 키예프 공국(公國)의 중심지로서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공동의 민족적 근원지이며, 특히 크림반도는 서기 988년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정교(Orthodox) 세례를 받은 성지(聖地)로 종교적 근원지이다. 둘째, 경제적 차원에서 탈소비에트 국가 중 두 번째로 인구가 많고 세 번째로 경제 규모가 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통합된 산업·교통·에너지 인프라를 가지고 있다. 셋째, 안보적 차원에서 우크라이나가 NATO 및 EU에 가입할 경우, 이는 러시아와 NATO 간 완충지대 상실은 물론, 탈소비에트 지역통합 프로젝트에서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이탈을 의미한다. 따라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탈소비에트 지역통합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끈질기게 설득과 압박을 계속하면서, NATO 및 EU 가입에 반대했다.
2013년 말 러시아는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정부에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면서 EU와의 제휴 협정 체결 중단과 러시아 주도의 관세동맹 참여를 요구했고, 유로마이단 시위로 2014년 2월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되고 친서방 성향의 과도정부가 수립되자 우크라이나 정부의 민족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크림반도와 돈바스의 독립 선언을 지지했다. 더 나아가, 러시아는 2014년 3월 주민투표를 거쳐 친러 지역인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2014년 4월부터 시작된 돈바스 내전에서 루간스크 인민공화국과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을 지원했다. 따라서 2013년 11월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위기’는 러시아의 탈소비에트 지역통합 프로젝트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돈바스 내전
9세기 후반~13세기 중반 키예프 공국은 흑해에서 발트해에 이루는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공국을 공동의 국가적 기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2022년 2월 24일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우리는 슬라브인, 세 슬라브 민족이다. 자, 앉아서 미래의 운명을 영원히 결정하자”라고 언급하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협상 개최를 제안한 바 있다. 13세기 중반 몽골-타타르의 침입으로 인해 키예프 공국이 붕괴하면서, 이 광활한 지역은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5세기 후반 킵차크 칸국에 맞서 싸우면서 모스크바를 기반으로 하는 모스크바 공국은 영토 확장을 거듭하며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지만,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은 계속해서 다른 강대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우크라이나 서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의 지배를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에 의해 분할되었지만, 크림반도를 포함한 동부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거쳐 18~19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이후 서부 전체가 폴란드 재분할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독일, 다시 1921년 3월 리가 조약에 따라 폴란드의 지배하에 놓였다. 반면 동부는 1922년 12월 소련 결성에 참여하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이하 우크라이나)이라는 명칭으로 구성 공화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라 마침내 서부도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이 소련의 승리로 끝나자 우크라이나의 국경선은 보다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따라서 1954년 2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ussian Soviet Federative Socialist Republic)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전된 크림반도를 제외하면,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국경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확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찌감치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동부와 오랜 기간 다른 강대국의 지배하에 놓였던 서부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련의 구성 공화국인 우크라이나, 더 나아가 소련이라는 하나의 단위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1991년 12월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소련 해체로 강력한 구심력이 사라지자 잠재되어있던 정체성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우크라이나 서부는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우크라이나인이 압도적이고,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인정하지만 정교 예식을 따르는 이른바 ‘우니아트(Uniate)’의 영향권에 속한다. 반면 우크라이나 동부는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러시아와 경제적, 문화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정교의 영향권에 속한다. 이 때문에 서부는 NATO 및 EU 가입을 지지하고, 동부는 러시아와 관계 강화를 우선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크림반도는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를 차지해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친러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2014년 3월 크림반도는 러시아에 병합되었지만, 이른바 ‘돈바스’로 불리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루간스크주와 도네츠크주는 2014년 4월 각각 루간스크 인민공화국과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지난 8년간 우크라이나 정부와 내전을 벌였다. 내전이 격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 우크라이나,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로 구성된 3자 접촉그룹 대표들과 돈바스의 두 공화국 대표들이 2014년 9월 5일 ‘민스크 의정서(민스크협정-1)’에 서명하고, 이어서 2014년 9월 19일 ‘민스크 의정서 조항 이행에 대한 각서’에 서명했다. 이러한 합의가 휴전으로 이어지지 않자, 다시 2015년 2월 12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독일, 프랑스로 구성된 이른바 ‘노르망디 4국’이 ‘민스크협정 이행에 관한 복합 조치(민스크협정-2)’에 합의하고, 3자 접촉그룹 대표들과 돈바스의 두 공화국 대표들이 이에 서명했다. 이러한 ‘민스크협정’의 골자는 첫째, 휴전 및 중화기 철수와 이에 대한 OSCE의 모니터링·검증, 둘째, 지방선거 시행 방식과 함께 루간스크주와 도네츠크주의 향후 체제에 대한 대화 시작, 셋째, 분쟁에 참여한 인사의 기소·처벌을 금지하는 입법 및 시행과 모든 인질·불법 구금 인사의 석방 및 교환, 넷째, 포괄적인 정치적 해결 이후 분쟁 지역 전체에서 우크라이나 정부의 국경에 대한 완전한 통제 회복, 다섯째, 루간스크주와 도네츠크주의 특성을 고려한 분권화를 핵심 요소로 규정하는 우크라이나 헌법 개정과 이들의 특별지위에 대한 입법 등이었다.
하지만 지난 8년간 ‘민스크협정’은 단 하나도 이행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루간스크주와 도네츠크주의 특별지위 보장, 사면, 지방선거 조직 등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이러한 조항이 이행된 후에 국경에 대한 우크라이나 정부의 통제가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지방선거 시행과 함께 루간스크주와 도네츠크주의 우크라이나로 복귀를 위한 핵심 조건으로서 국경에 대한 통제 회복, 우크라이나 언론 및 정당의 자유로운 접근 보장 등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그 결과 휴전 합의 위반이 반복되는 가운데 러시아는 돈바스의 두 공화국을 지원하면서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에서 군사훈련을 명분으로 ‘무력 시위’를 계속하고, 우크라이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지원을 받으면서 NATO와 군사훈련을 이어갔다. 그 결과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 그리고 돈바스에서는 수시로 긴장이 고조되었고, 교전 격화로 인해 지난 8년간 약 13,000명이 사망했다.
맺으며
2021년 11월 초부터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전문가 대부분이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을 낮게 본 이유는 첫째, 침공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켜 우크라이나의 탈소비에트 지역통합 프로젝트 참여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둘째, 지난 8년간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지원으로 무장한 우크라이나군을 신속하게 제압하기 어려워 러시아군의 희생도 클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 약 4,000만 명의 인구와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영토를 가진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장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셋째, 침공 이후 친러 정권을 수립해야 하는데, 지난 8년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확산으로 친러 정치세력의 기반이 거의 상실되었기 때문이었다. 넷째, 무엇보다도 주권 국가에 대한 침공은 러시아가 그동안 NATO 확대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확보한 대응조치의 정당성 자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이었다. NATO 회원국이 자신의 안보를 위해 러시아의 안보를 희생하고 있다고 비난한 러시아가 자신의 안보를 위해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희생하는 침공을 감행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러 갈등, NATO 확대, 러시아의 탈소비에트 지역통합 프로젝트, 돈바스 내전을 배경으로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침공 결정을 정당화하는 명분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탈냉전기의 종언과 이른바 ‘신냉전’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탈냉전기 세계질서의 문법은 폐기되었고, 새로운 세계질서의 문법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