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건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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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6월 25일 부산 충무국민학교에서 열린 ‘6‧25 2주기’ 행사 도중 일제 강점기에 의열단윈으로 활약하던 유시태가 이승만 체제에 불만을 품고 권총으로 암살 시도했다.
* 사진 미군 방첩부대(CIC)의 사진첩에 수록된 이 대통령 암살 시도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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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인

이 일로 유시태와 공모한 김시현은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 둘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상하이 등 해외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10여 년의 옥고를 치루었던 애국지사들이었다. 유시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진, 예산에서 시위에 참가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1921년 의열단에 가입해 투쟁자금 모집을 담당했다. 김시현은 1923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할 목적으로 폭탄을 반입했다가 사전에 체포돼 12년형이 선고되는 등 일제에 의해 세 차례나 복역했다. 해방 후 민의원(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김구 선생 암살 배후이자 독재를 휘두른 이승만에 대해 극단적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김시현은 재판에서 “이 대통령은 독재자이며 정실인사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 민생 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없다. 6‧25 발발 6개월 전부터 북한은 전쟁 준비로 분주했음에도 정보에 어두웠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라고 질타했다.
그는 “6‧25 개전 이튿날 방탄차를 타고 도망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 철교를 끊어 시민들의 피란을 막았으면 국가원수로서 할복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될 판에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으니 어찌 대통령이라 하겠는가” 라며 암살 후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둔 사람은 없으나 누가 하더라도 이승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1953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 1960년 4‧19 혁명 후 과도정부에서 시국사범 제1호로 석방되었다. 유시태는 “그때 권총이 발사됐더라면 수많은 학생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그것이 한이다”라고 출소 소감을 밝혔다.
❏ 범행 수법
이 대통령이 연단에서 원고를 보며 연설하는 사이에 연단 뒤쪽에 하얀색 옷을 입은 남성이 왼손에 권총을 들고 이 대통령을 겨냥하기 바로 직전의 자세가 담겨 있다. 어깨에 소총을 맨 채 연단을 지키는 헌병도 있지만, 부동자세로 앞쪽만 주시하고 있어 뒤쪽에서 벌어지는 위기 상황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연설이 시작되자 귀빈석을 박차고 나온 유시태는 불과 3m 떨어진 거리에서 두 차례 격발했으나 불발, 현장에서 체포됐고 이 전 대통령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는 이 사건 외에도 1948년과 1954년 등 3차례 있었지만 법정 사진 외에 저격 순간의 장면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대통령 저격이라는 역사의 현장이 담긴데다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앞에서 포착해 대단히 희귀한 사료다.
부산 충무로에서 벌어진 이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은 일제 하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출신인 유시태가 김시현 민주국민당 의원과 공모한 것으로 유시태는 김 의원의 양복을 빌려 입고 의원 신분증을 보여주고 귀빈석에 착석할 수 있었다. 부산 미 문화원이 16미리 카메라로 찍은 필름을 분석한 결과 김시현이 모자에서 권총을 꺼내 건네주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사진 아래엔 영어로 “암살을 시도한 남성의 이름은 유시태로 이 전 대통령을 저격(Snipe)하려 하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당시 김시현 민주국민당 의원이 이끌던 12인의 반정부 조직이 이번 사건을 주도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