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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사건

이스라엘 ‘라빈’ 전 총리 암살 사건

  • 작성일2019-02-08

❏ 사건 개요

뉴욕타임스 신문에 실린 기사, 라빈 총리 가족

* 뉴욕타임스 신문에 실린 기사, 라빈 총리 가족

 1995년 11월 4일 22시경 이스라엘 라빈 총리가 평화집회인 ‘라빈수상의 중동평화 정착계획 지지 군중대회’를 마치고 차량에 탑승하려는 순간, 괴한의 총격에 피살당했다. 

    

❏ 사건 내용  

*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전총리(1922~1955), 범인 이갈 아미르(1970~)

*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전총리(1922~1955), 범인 이갈 아미르(1970~)

 1995년 11월 10만 여명이 참석한 텔아비브 시청 앞의 ‘라빈 총리의 중동평화 정착계획 지지 군중대회’에서 연설을 마친 라빈 총리가 시청 계단을 내려와 차량에 탑승하려는 순간, 약 2~3m 떨어진 곳에서 범인이 BERETTA 9mm 권총으로 DUM-DUM탄을 발사했다. 1발은 라빈 총리의 등에 명중, 2발은 총리 뒤에서 수행하던 경호원이 총성 직후 총리를 차 안으로 밀어 넣는 순간 어깨 부분에 맞았다. 사건 직후 병원으로 가는 도중 라빈 총리는 숨졌다.


 이스라엘 정부는 암살사건 발생 직후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진상을 조사한 결과, 이 사건은 이갈 아미르의 단독범행으로 배후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가족들은 몇 가지 의혹을 제기하며 암살사건 재수사를 요청했다. 


 범인이 어떻게 라빈 총리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 경호원들이 왜 범인에게 응사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고도의 대응본능을 갖춘 경호원들이 라빈 총리에게 3발의 총알이 발사됐음에도 응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의혹은 암살사건을 신 베트 요원(비밀경찰)인 아비샤이 라비브는 아미르의 라빈 암살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혐의로 라비브는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사건 직후 누군가 “공포탄이다”라고 소리쳤다고 밝힌 라빈 전 총리의 미망인은 경호 요원에 의해 라빈 전 총리가 탑승하지 않은 다른 차량으로 병원에 갔다. 미망인은 이동 중 경호 요원이 “진짜 총알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라빈 전 총리 딸은 “케네디 암살사건의 진상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듯이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지에 대한 의혹도 풀리지 않고 있으며, 오스왈드가 케네디 암살범으로 지목됐듯이 이갈 아미르가 아버지의 살해범으로 밝혀졌지만 진상은 보다 깊숙하고 복잡하다”고 주장했다. 

암살사건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메이르 샴가르 전 판사도 수사가 미흡했음을 인정했다. 사건 당시 외무장관으로서 현장에 함께 있었던 시몬 페레스 전 총리도 가족들의 뜻을 존중해 암살사건 재수사를 촉구하였다. 

  

❏ 범인 관련사항

 ‘카흐네차이’로 알려진 유대 극우파 집단에 소속된 범인 이갈 아미르(Yigal Amir, 25세)는 총리를 암살하고 체포되었다. 그는 라빈이 오슬로 평화협정에 따라 이스라엘 땅을 팔레스타인에게 넘겨주는 것을 막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1996년 특별형사재판에서 “나에게 총의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2000년 이상 된 유대민족의 이 땅에 대한 사랑이다.”라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기타

 라빈은 이스라엘 건국 이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정착지에서 태어났다. 팔마츠 유대인 부대에 입대하여 1948년 독립전쟁에 참전해 이집트 전선에서 싸웠다. 또 1967년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한 3차 중동전쟁 때 그는 참모총장으로 불과 6일 만에 요르단 강 서안, 골란고원, 가자지구, 시나이반도를 점령하는 대승을 거뒀다. 이때 그에게 ‘영웅’ 칭호가 부여됐다. 이어 1974년에는 이스라엘 본토 태생으로 처음 총리에 올랐다. 그는 1992년 두 번째로 총리직을 맡았으며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1994년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 등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95년 1월 4일 오슬로 평화협정을 타결시킨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피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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