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경호의 원형은 있는가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경호조직 변천사… 역사와 전통에 따라 계승과 단절 지속

간혹 대통령경호처와 경호부대는 대통령의 근위대나 친위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 단어의 어감은 세계 역사 속에서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이는 권력자(수구세력)에 기생해 호가호위 한다는 느낌과 독일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 등이 주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국가의 통수권자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실력집단이 안전을 보장하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현대에는 안전보장을 위해 구조적 측면에서 특정 기관을 넘어서 기민한 협력을 전제로 한 네트워크 체제로 운영하기도 한다. 다만 신속한 지휘체계를 확보하려면 콘트롤타워(control tower)가 필수적이다. 이 콘트롤타워는 경호대상자와 의사소통관계에서 직결성이 있어야 하고, 조직적으로는 독립성과 균형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구한말부터 현재까지 이뤄진 경호조직의 변천사를 살펴본다.
우리나라에서 경호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경호기관 원형에 대해서는 정립된 이론이 없는 게 사실이다. 국내 각종 사료를 살펴보면 1874년 왕을 호위하기 위해 무위소가 운영되고 1884년 용호영(이후 친군용호영으로 확대)이 운영됐다. 1894년 3월21일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고종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한다. 1894년 6월8일 청군이 출병한 다음 날인 6월9일 일본은 텐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출병했다. 조선이 청·일간 전장이 될 것을 우려한 고종은 6월11일 동학군과 전주화약을 맺었다.
일본의 침탈에 따른 호위기구의 설립
하지만 일본은 철병을 거부하고 내정에 간섭했다. 7월23일 경복궁을 습격하여 고종을 칼로 위협(경복궁 습격사건)하고 내정개혁을 요구하며 일본군 잔류의 명분을 확보했다. 당시 경복궁 수비군이 초기에 적절히 대응했으나 당시 수 개의 군영으로 이루어진 군(軍)간의 지휘체계 탓으로 방어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며,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갑오개혁이 추진됐다. 사실상 입헌군주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경찰관제직장이 반포되면서 근대 경찰조직을 설립해 과거 포도청을 대체했고, 궁내부와 의정부로 왕실사무와 행정사무가 분리됐다.

그러다가 1894년에 일본의 영향으로 훈련대가 설치되었다. 훈련대가 왕의 호위를 담당하도록 하려는 일본의 구상은 미국과 러시아의 반발로 무산됐다. 고종은 1895년 군의 근대개혁 일환으로 수도방위를 위해 친위대를, 호위를 담당하기 위해 시위대를 설치했다. 같은 해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훈련대 일부가 동참했다. 이때 호위를 담당하던 시위대는 일본군과 마찰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훈련대에 편입됐고, 육군은 서울을 방비하는 친위대와 지방을 방비하는 진위대로 분리했다.
1896년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거처를 경복궁에서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호위를 위한 시위대를 재조직하게 된다. 시위대는 1897년 2월20일 덕수궁으로 환어하면서 고종의 호위를 맡았다. 같은 해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1899년 6월2일 계엄사령부 성격의 원수부를 설치한다. 대원수는 고종이며, 원수는 황태자가 되었고, 중앙군은 수도방어를 하는 친위대와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는 시위대로 양립하게 된다. 호위대 관련 사료에 따르면 원수부 산하에 730여명의 호위대를 두었다고 한다. 시위대 가운데 일부 인원을 차출해 조직을 운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1년 11월17일 포달 77호로 궁내부 관제 중 궁내경위원을 증치하여 경위원을 설치한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등록된 포달 77호로 보아 경위원의 임무는 황궁 내의 경비와 위법자 규찰, 집포였으며 30여명 규모였다. 일부 연구자료에 따르면 경위원이 근대경찰조직으로서 황제의 호위를 담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700여명의 규모의 호위대에서 경위원이 불과 30여명으로 황궁 내의 호위임무를 수행하기엔 너무 작은 규모라 여겨진다. 당시 경무청 총책인 경무사가 가담한 역모사건이 발생하는 등 친위경찰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일본의 영향력이 작용되는 경부·경무청의 견제를 위한 황제 직속 정보기관으로 이해된다.
30여명의 경위원이 맡기엔 무리 많아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에 따라 일본과 공수(攻守)동맹을 맺게 된다. 물론 일본의 압박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1905년 4월16일 친위대가 해산되고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던 시위대 또한 5,000명에서 2,500명으로 감축된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1906년 일본 경무고문 마루야마의 주도로 궁궐 안에 일제경찰이 주둔하게 된다.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본은 7월20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황제가 즉위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7월24일 정미7조약이 체결돼 대한제국의 각부 차관에 일본인이 임명되어 내정을 직접 관여한다. 또한 형식적으로는 순종의 칙령으로 7월31일 대한제국군이 해산하게 된다. 시위1연대 2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자결했고 시위대의 일부 병력은 일본군에 대항해 정미의병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일본은 황실경호부대로 시위2연대 2대대의 존치를 허락하며 이는 차후 644명 규모의 근위보병대 1개 대대로 변화한다.
1909년 7월12일 일제는 기유각서를 체결해 사법권을 박탈하고 친위부를 설치해 황제 폐위에 대한 조선인의 반발을 무마하려 했다. 친위부는 현재의 장관급 인사 포함 5명에 불과한 명목상의 부처였으나 근위보병대·시종무관부를 통솔해 황제의 호위 관련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게다가 퇴위했으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고종에 대한 감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황족 감시를 위해 순종황제가 기거하는 창덕궁에 창덕궁경찰서를 설치하고, 고종황제가 기거하는 덕수궁에 덕수궁분서를 설치한다. 창덕궁경찰서는 총독부 경무총감 직속기관으로 30명이었으며, 덕수궁분서는 19명으로 창덕궁경찰서장은 당연히 일본인이었다.

한일병합 이후에도 조선인 반발을 우려한 일본은 왕가(황제에서 강등)의 존치를 허용했고, 보호명목으로 근위보병대를 조선보병대로 격하해 운용을 지속했다. 1919년 고종에 이어 1926년 순종마저 승하하자 조선보병대는 순종황후를 호위하다 1931년 해체되고 만다. 이후 순종의 왕위를 계승한 영친왕은 이미 1907년 볼모격으로 일본에서 정략결혼을 하고 일본군에 복무하고 있었다. 각종 사료에서 영친왕의 국내 귀국 시에는 일제 경찰이 경호를 담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승만 거처 경비 담당이 경호도 맡아
1945년 광복 뒤 이승만 박사는 10월16일 귀국해 돈암장에 기거하게 된다. 이때 중부경찰서 김장흥 경위가 돈암장 경비 목적으로 파견되어 이승만 박사의 경호를 담당했다. 김장흥은 이승만 박사가 마포장을 거쳐 이화장에 기거할 때까지 경호책임자였다. 이승만 박사의 대통령 취임 뒤 경무대경찰서(창덕궁경찰서에서 관할구역 및 명칭 변경)의 서장을 역임한 뒤 내무부 치안국장까지 오르게 된다. 당시 군정시기 국군 창설 이전에 전국적으로 조직화된 무장조직이 경찰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고, 한 번 경호를 담당한 김장흥이라는 책임자를 쉽게 바꿀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의 정식적인 군통수권은 1948년 8월15일 헌법제정과 정부수립이 선포된 때에 비로소 명문화됐다. 하지만 군정을 거치며 미군이 국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에 경호부대를 편제하기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6·25를 거치며 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에게 위임되었다. 피란시기 등 전시 대통령경호는 육군 특무부대와 경무대 경호경찰이 협업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특무부대 특성상 공식적인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휴전 이후 경무대경찰서장에 오른 곽영주는 경무관 신분으로 대통령경호 임무를 넘어 정치에 관여했고, 1960년 4·19 이후 반국가적 행위로 역사의 단죄를 받았다.

내각책임제인 2공화국이 들어서자 1공화국에서 부통령 경호를 맡고 있던 서울시경 소속 경호대가 대통령과 총리의 경호임무를 맡았다. 기존 경무대경찰서는 2공화국 초기 국민정서의 영향으로 1960년 6월29일 폐지되고 8월13일 서울시 경찰국 경비과에 경무대경찰관 파견대를 설치한다. 12월 30일 윤보선 대통령이 경무대를 청와대로 개칭함에 따라 경무대경찰관파견대는 청와대경찰관파견대로 명칭이 변경된다.
현대적 경호조직으로 경호실 창설
1961년 5·16 직후 중앙정보부 창설되면서 경호대가 설치되었고 대통령 직속 명령체계를 갖는 수도방위사령부가 설치됐다. 당시 군작전지휘권을 주한미군이 갖고 있었는데, 수도방위사령부는 지금도 한미연합사령부와 별도로 대통령의 직접 지휘를 받는 명령계통을 지니고 있다. 최전방이 아닌 예비사단 중 30사단(한강 이북)과 33사단(한강 이남+인천, 이후 17사단으로 개편)의 병력을 차출해 30대대와 33대대를 설치해 북악산과 인왕산을 경비하며 특정경비지구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후 30단·33단을 거쳐 1경비단으로 통합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63년 12월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과 함께 대통령경호실이 창설됐다. 군부정권 아래 창설된 만큼 군이 주도했으나, 현장요원으로 군에서 전역한 인원을 채용(별정직공무원)하거나 당시 경호실 산하로 편입된 서울시경 경비과(현재의 101경비단)에서도 인원을 차출해 운용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다양한 출신의 인원들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66년 최초의 대통령 경호요원의 공개 채용이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이후 대통령경호·경비대책통제단이 설치돼 현재의 대통령경호안전대책위원회로 이어졌다. 아울러 경비과의 외곽경비 임무가 수경사 30대대 5중대에 인계되어 현재의 55경비단으로 이어지고, 22특별경비대 등이 설치되는 등 현재 군·경 경호부대의 기틀을 갖추고 심화된 경호작전 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경호실은 1988년 직원 채용을 공채화하고, 문민정부에는 최초로 내부 출신 경호기관장이 임명되는 등 더욱 중립적인 경호전문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한편,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경호기관의 역사적 흐름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국가원수의 경호조직은 각 국가의 역사와 전통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어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 및 조직의 실효성, 특정 기관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 견제와 균형 논리에 초점을 맞춰 발전해 온 것이다. 역사적 판단을 뒤로 하고 기관운영의 실용성으로만 판단한다면, 우리나라도 특정기관(또는 특정기관 내 부서 등)에 대한 견제논리로 경호기관(또는 특정기관의 책임부서)이 변화를 거듭하며 특정 색채마저도 중립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여러 기관의 통합체계를 운용하는 까닭
국가기관으로서의 경호처가 아닌 경호부대를 포함한 광의의 경호처를 돌아본다면 여러 기관의 통합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호시스템은 각 기관의 고유 역량을 통합하고 최적화해 국가 차원의 자원들을 경호임무 수행간 적재적소에 분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경호처가 국가원수의 직속기관으로 존립하는 이유는 임무수행을 위한 콘트롤 타워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직결성과 완결성을 가하기 위해서다.

과거 세계 여러 나라의 근위대와 같이 국가원수 직속기관이라는 무게감은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과 국민적 요구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더욱 실력을 배양하고 엄중한 중립성을 유지해 ‘국가원수의 절대안전’이라는 임무에 정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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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의 최적화 방안을 찾아서…
세계 각국의 경호기관도 견제와 균형의 논리에 따라 조직 운용
세계 각국의 경호기관도 역사적 변천의 과정을 겪어왔다. 미국은 1901년 맥킨리 대통령의 암살 이후 1865년에 설립된 연방수사기관 비밀경호국(SS: secrete service)에 대통령의 경호를 맡겼다. 현재 미국은 세계 최대의 군사강국이지만 당시 각 주에서 민병대를 운용하는 등 반군사전통이 강했고, 대통령의 권한 확대를 우려한 국회의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연합국의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서는 영토 전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강력한 실력기관이 필요했다. 때문에 연방 전체를 관할로 하며 정치중립적 색채가 강한 재무부 산하의 SS가 경호를 맡게 된 것이다.
영국의 경우 수도경찰청이 총리 경호를 담당하고 있지만 명목상 군 통수권자는 영국 국왕이다. 현재도 경찰과 함께 왕실근위대가 왕을 호위하고 있다. 왕실근위대는 실제로 버킹엄궁의 관광명물이 아닌 강력한 전투부대이며 근위기병대(산하 2개 연대)·근위보병대산하 5개 연대·왕립포병사단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부대이다. 입헌군주제 국가의 대부분이 행정수반인 총리의 경호를 경찰이 담당하는 것은 현존하는 국왕과의 관계를 고려해서이지 아닐까 싶다. 프랑스는 SDLP라고 하는 경찰청 산하 경호국에서 대통령경호를 담당하지만 직접 근접경호(protection)를 담당하는 GSPR이라는 부서가 별도로 있다. 이 GSPR은 군인경찰(gendamerie)과 경찰의 합동 조직이다. GSPR의 책임자는 2년 마다 양 기관에서 교대로 임명된다고 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강력히 중앙집권화된 경찰과 치안을 양분했던 군인경찰제도(舊헌병군)의 전통과 균형성을 고려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도 군인경찰(carabinieri)제도를 유지하며, 프랑스와 유사한 경호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독일의 경우는 연방범죄수사청(BKA)이 대통령·총리·각료들의 경호를 담당하는데,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히틀러의 SS 등 친위대에 대한 반발로 보다 중립적인 기관에 경호를 맡긴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독일은 연방범죄수사청이 제도적 관점에서 국가차원의 단독 경찰기관이 아니라고 해석된다. 실제로 독일에는 별도의 연방경찰청도 존재하며, 주(州)경찰 중심으로 치안제도가 확립되어 있어 연방범죄수사청은 성격상 미국의 연방수사국(FBI)에 비견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이후에 정부직속 군대인 어친병(御親兵)을 창설했다. 이후 근위사단으로 확대가 되어 천황·황궁 수호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군대가 해산되며 이 근위사단들도 같이 해산되었다. 때문에 지금의 황궁 경호는 경찰청의 지휘를 받는 황궁경찰본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본 총리의 경호는 경찰청 경비국의 계획업무와 동경도 경시청 경호과의 근접경호로 나누어져 실시된다. 러시아의 경우는 구 소련 시절 국가안전위원회(KGB)의 한 국(局)에서 담당했으나, 러시아는 소련 연방 해체 이후 KGB의 과도한 권한을 분산시키기 위해 기능별로 해체해 재구성했다. 국외정보는 SVR, 국내보안업무는 FSB로 분할하고 대통령 경호와 국가주요시설 경비를 위해 연방경호실(FSO)을 대통령 직속으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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