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왜 이렇게들 많이 오는 거지?...용산공원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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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2.4.1)
왜 이렇게들 많이 오는 거지?...용산공원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
2020년, 벌써 용산공원이라는 간판이 붙은 지 2년이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한글박물관, 용산가족공원, 전쟁기념관 등 용산기지에서 조금씩 조금씩 되찾아 온 문화 공간에 이은 새로운 장소다. 주한미군의 일상이 남아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을 용산공원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문을 연 지 2년 가까이 되었지만, 이제야 현장에 다녀왔다. 안내 직원의 말을 들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고 한다. 아직 국가공원으로 완성되려면 하세월이 남아 있는데, 그저 평범해 보이는 이곳에, 대체 왜 그리 많은 젊은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청춘들 발길이 잦은 이유
한국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은 차태현, 성동일, 고창석 등이었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향할 무렵, 주인공들의 동굴 파기 작업은 극에 달했고, 영화에서 도굴꾼 출신으로 땅파기의 신공을 보여주었던 고창석이 뚫린 흙벽에서 수압 높은 물기둥과 함께 한강으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웃었던 기억이 있다. 개방된 용산미군기지 장교 숙소 정문을 들어서면서 불쑥 이 영화가 떠오른 것은 바로 이곳 장교 숙소 건너편이 조선 시대에 겨울에 한강에서 생산한 얼음을 보관했던 서빙고였기 때문이다. 옛날이 다 그랬듯, 서빙고, 그러니까 이촌동 앞을 흐르는 한강은 봄, 여름, 가을에는 고기 잡는 어촌이었고, 겨울철에는 꽝꽝 언 얼음을 재단하여 걷어내는 채빙 현장이었다. 이촌동 북쪽 남산 방향 둔지산을 둘러싼 용산 일대는 논과 밭이 가득한 삶의 현장이었다. 이 농토가 오랜 세월 외국 군대들이 머물고 살아가는 공간이자 군사 기지로 사용되어오다 드디어 한국 시민의 품 속으로 돌아오기 직전이다. 공식 명칭은 용산공원. 요즘 하도 용산공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돌다 보니 이름만 들으면 당장 광활한 뜨락과 숲이 나올 것 같은 기대를 하게도 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용산공원은 훗날 이곳 일대가 완벽한 공원으로 완성되고, 주변을 둘러싼 빌딩숲이 공원을 내려다 볼 시점에 비하면 천 분의 일 정도 규모밖엔 되지 않는다. 지금은 용산공원 맛보기 공간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2022년 봄의 용산공원은 더욱 소중하다. 왜냐고? 공원 조성 사업이 본격 시작될 경우 오늘 용산공원에서 보고 느끼는 미군 장교 숙소의 이국적 풍경을 다시는 이곳에서 볼 수 없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곳에 주둔했던 청나라 군대, 일본군, 미국군 등의 체류 역사 등을 돌아볼 기념관 정도는 생길 수 있겠으나, 오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 길게 남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용산공원 미군 장교 숙소 지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경의중앙선 서빙고역으로 가거나, 차를 가져갈 경우 용산가족공원 주차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용산공원 입구는 다른 공원들처럼 입구 표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정문도 특별히 관찰하지 않으면 찾기가 쉽지 않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용산공원의 입구는 행정명 서빙고역 교차로 삼거리 횡단보도 북쪽 인도에서 서쪽 국립중앙박물관 방향으로 약 200m쯤 걸어가다 오른쪽에 위치한다. 바리케이드가 있는 정문으로 들어가면 정면으로 안내소가 있다. 모든 방문자는 제일 먼저 그곳에 들어가 번호가 적혀 있는 방문 목걸이를 받은 뒤 방문소 뒷문으로 나가면 비로소 용산공원 맛보기 여행이 시작된다. 방문소 입구에는 대기선이 있다. 용산공원의 동시 입장 인원은 최대 300명이다. 번호표 역시 300번까지만 있다. 현장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주말의 경우엔 많은 사람들이 대기줄에서 기다리다 나가는 사람이 있을 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고, 또한 그만큼 개방 구역이 아직은 좁다는 뜻이다. 물론 용산공원이 완성되려면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 누구도 모른다.
용산공원이라는 간판 안에 있는 볼거리라고는 붉은색 벽돌 빌라가 90%이다. 그 벽돌 빌라가 뭐라고 이리도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을까. 둘러 본 결과 그 이유는 이국적인 사진 스폿 때문이었다. 해외 여행을 못 가본 지 2년이 되었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불투명하다. 그런데 용산공원에 와 보니 서울에서 보기 힘든 디자인의 빌라들이 즐비하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서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닮은 나무들, 독일가문비나무, 목련, 전나무, 삼나무, 중국단풍 등이 곳곳에 서 있다. 뜨문뜨문 있는 나무들이지만 거목이 아니라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다. 미군 장교와 가족을 위한 주거 공간이니만큼 테니스장, 바비큐를 해 먹을 수 있는 피크닉 구역 등 그들의 생활 흔적을 볼 수 있는 생생한 공간들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장교 숙소들은 외관만 볼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외부 정비 중인 집들이 많다. 그중 몇 곳은 방문객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스토리를 담아두어 눈길을 끌고 있다.
▶질곡의 한국 현대사 한복판에 있는 역사의 어긋남
용산공원에서 만든 지도 팸플릿을 보며 그 동선대로 이동하는 것이 구경엔 수월하다. 사실 동선을 벗어나봤자 특별한 곳은 나오지 않는다. 장교 숙소 외곽에 설치되어 있는 소도로의 도로 표지판 정도가 용산공원 산책의 이국적 정서를 조금 더 올려주는 정도. 안내 라운지를 나가 주택 사이로 조금 걸으면 주택 단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을 볼 수 있다. 대부분 1945년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파일들이다. 현대사에 관심이 있든 그렇지 않든 이곳 야외 전시장은 꼼꼼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사진들은 특별한 사료나 책을 뒤지지 않고는 보기 어려운 장면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 되었던 서빙고와 국가의 얼음 독점을 떠올리게 하는 채빙 작업 장면, 해방 직후 서울 상공을 나는 비행기에서 촬영한 미국 공군 113기와 그 아래로 펼쳐진 서울의 모습은 판타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서울을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그 옛날이었다 해도, 서울에는 그때도 다닥다닥 건물이 많았다. 사진 속에는 공군 비행기는 물론 용산역,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창설한 조선군 사령부, 용산에 주둔 중인 미군들의 기념사진, 주한 미군과 인사 중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 일본식 건축물인 용산역 전경, 유엔민간원조사령부의 한국 전후 복구와 원조 활동 관련 사진 같이 1945년 해방과 1950년 전쟁, 휴전 등 우리나라 정황의 일단 등의 장면들이 담겨 있다. 오직 사진 찍기만이 목적이 아니라면, 용산공원의 과거와 오늘, 미래가 궁금하고, 그 과정을 지켜 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꼭 한 컷 한 컷 들여다 보며 궁금해하고, 아파하고, 빙그레 웃고, 꿈 꾸는 시간을 갖길 권해 본다. 삶은 과거와 미래는 물론 오늘 또한 꿈 같은 판타지 아니던가.
▶카페에서 커피를 팔지는 않아요
야외갤러리 ‘새록새록’을 지나면 넓은 잔디 광장이 나오고, 그 한쪽에 카페 간판이 걸려 있다. ‘차나 한 잔 마셔 볼까’라는 생각으로 그곳에 들어가 주문 라운지를 찾으면 당황하게 된다. 이곳은 커피나 차, 디저트를 파는 카페가 아니다. 지금은 카페가 아닌 쉼터이다. 1층에는 유아용 놀이방이 있다. 아이를 동반한 방문객들을 위한 곳이다. 외국인 여성 두 사람이 각자 아이들을 데려와 놀이방에서 놀게 하고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보이기도 했다. 타일로 마감한 대형 테이블, 감성을 자극하는 샹들리에, 눈을 호강시켜주는 초록색 오브제들, 두리번거리게 되는 거울의 방, 크고 작은 미팅룸과 마당이 내려다 보이는 2층 미니룸 등을 만날 수 있다. 단, 이곳에서 커피나 차를 사 먹지 못함은 물론, 가방 속에 가져간 그 어떤 음식물도 먹을 수 없다. 메이크업, 헤어 드라이어 사용, 옷 갈아입기 등도 금지된 공간이다. 아마도 쇼핑몰 홍보용 사진 촬영을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꽤 있던 모양이다.
▶오픈하우스 오손도손 그리고 미군 가족 스토리
이곳 용산공원은 공원 조성 예정지 즉, 주한미군을 위한 각종 군사, 생활 시설 가운데 극히 일부를 개방한 곳으로 구체적으로는 미군 장교 숙소 5단지 지역에 국한한다. 이름 그대로 예전 미군 장교 숙소 5단지는 주한미군 장교들의 숙소가 있던 곳이다. 오픈하우스 ‘오손도손’은 이곳에서 살던 미군 장교와 그의 가족들이 남긴 한국 생활의 느낌, 추억 등을 간단히 기록한 곳이다. 기록만 남긴 게 아니라,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사진을 실물과 가까운 크기로 조형화, 비록 개인이지만 주한미군의 삶, 그들이 절실했던 시절의 대한민국의 무형의 해리티지를 제공하고 있다. 오손도손은 이곳에서 거주했던 주한미군 가족 모임인 주한미국용산기지부녀회(AFSC)와 찰스 정이라는 인물이 기증한 소품들로 꾸며졌고, 방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직접 작성한 추억들이 벽에 붙어 있다. 자료 속 조이와 잭 버넷 남매는 용산기지 영내에 있는 ‘서울 아메리칸 초등학교’를 다녔다. 2014년 아빠와 함께 한국에 온 남매는 이곳에서 학교도 다니고, 피아노도 배우고, 수영교실에도 참여했다. 조이는 사우스포스트 치어리더로 미식축구 팀을 응원하기도 했으며 걸스카우트 활동으로 서울의 구석구석을 탐방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동생 잭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국어를 배웠고, 태권도에 푹 빠져 금세 검은띠 유단자가 되어, ‘타이거스 시범단’의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다. 조이와 잭의 한국 생활은 2017년까지 이어졌다. 한국에 왔을 당시 잭의 나이는 세 살이었고, 유년 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후 여섯 살을 꽉 채우자마자 2018년, 독일 미군사령부로 발령이 난 아버지와 함께 떠나게 되었다. 조이와 잭이 독일에서도 즐겁고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길 빌어본다.
새미아 마운츠는 서울 아메리칸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다. 13세 때 이미 한국의 EBS방송에서 미디어와 공연 세계를 접했던 그녀는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 보스톤 컨서버터리 예술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부모님이 있는 한국에 와 직업도 갖게 된다. 그 뒤로도 새미아는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자신의 직업과 휴식, 일과 미래를 꿈꾸며 살았고 2019년에는 뉴욕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 현재는 콜로라도주 콜로라도 스프링에 살고 있다. 새미아에게 한국은 힘들 때마다, 미래가 불안할 때마다 넉넉한 품이 되어준 약속의 땅이었다. 그래서 지금 한국을 떠나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토머스 밴달 중장과 그의 부인 도린 밴달의 이야기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2013년 주한미군 21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한 그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8군 사령관을 역임하는 등 주한미군 최고위층의 일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세 명의 자녀 역시 본국에서 군인으로 살고 있었고, 토머스 장군은 아내와 한국에 머물렀다. 아내 도린 밴달은 주한미군과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서울의 안전하고 깨끗한 지하철, 다양한 박물관과 공원, 도심과 붙어 있는 아름다운 산, 상냥하고 성실한 한국의 시민들을 한국에서 겪은 최고의 일들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자녀들은 한국에 부모님을 만나러 자주 왔었는데, 마지막 방문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국을 찾았다. 토머스 밴달 장군이 8군 사령관을 마치고 귀국한 후 받은 건강검진에서 암이 발견된 것. 군인으로서의 마지막 삶을 한국에서 보낸 고인과 유족의 한국에 대한 추억은 남다를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 3대가 용산 기지에서 생활한 제이슨 터너의 가족 이야기, 아버지를 따라 한국의 절, 왕릉, 화성 등의 유적지, 산악 자전거 타기, 대천해수욕장에서의 수영 등 한국의 문화를 꼼꼼하게 체험한 스캇 포레이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스캇 포레이의 아버지는 미8군 밴드의 일원이었는데, 스캇은 아버지로부터 트럼펫을 배워 결국 밴드로 성장, 지금은 과테말라에서 밴드 리더로 지내고 있다. 한국에서의 모든 일상이 생생하게 기억나지만, 특히 김치 맛을 잊을 수 없어서 과테말라에서도 마야족 시장을 뒤져가며 재료를 구해 김치를 담가 먹는다고. 잠깐의 인연이 긴 일상과 추억이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주한미군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가 있다.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의 지점에서 그들을 보기도 한다. 어떻게 보든 주한미군 본인과 가족의 삶은 평범하고 때로는 외로운, 지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삶의 모습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오픈하우스 오손도손에서 느낄 수 있었다.
▶파빌리온과 용산공원 전시장
용산공원을 찾은 사람들 대부분의 종착지는 파빌리온 광장이었다. 공사 가림막 하나 없이 깔끔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주택들과 녹색 잔디 등 사진 찍기에 최고인 지점이 사진 배경에 목말라 하는 비주얼리스들을 이곳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곳에서 노니는 방문객들은 모두가 모델이고 사진 작가처럼 보였다. 한복이 힙스타일로 연출되고, 정장이 캐주얼처럼 자유로워지며, 그들의 눈빛, 몸짓에서 무언가를 갈망하는 미래 세대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길모퉁이 교통 표시판 앞은, 프레임 뷰가 어찌나 좋은지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용산공원 전시장. 이곳을 꼼꼼하게 보지 않고 용산공원에 다녀왔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개방된 용산공원은 이국적 풍경, 깨끗한 배경 등으로 사랑 받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용산공원 역사의 대부분이 한국인에게는 아픔과 함께 해왔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용산공원은 분명 한국이 땅, 조선의 영토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외국에서 들어온 군대가 단골처럼 머무는 주둔지로 각인되었다. 이태원이 초 이국적 공간으로 발전한 것 또한 용산기지의 절대적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용산공원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가 장악해 군대를 주둔시켰고, 청일전쟁과 을사늑약을 거치며 청나라 군대에서 일본군으로 기지의 주인이 바뀌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이 들어와 이곳을 재건, 캠프로 조성한 후 오늘날까지 용산 일대는 미군기지로 활용되었다. 2003년 한미 협약에 따라 미군 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했고, 2007년 용산기지를 국가공원으로 만들기로 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미군의 평택 이전은 2016년부터 시작되었고, 아직도 그 땅이 완전히 한국으로 되돌아 온 것은 아니다. 특히 군부대 특성상 토지 오염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미군이 완전히 이곳을 떠난다 해도 공원으로 완성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작지만, 국가공원 용산공원의 출발을 장교 숙소로 조성한 것은 미래 세대들에게 다행스럽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근차근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기 기회이기 때문이다. 언제가 될지 아직은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 용산공원이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능가하는 시민의 공원으로 완성되었을 때, 공원 곳곳에서 벌어질 일들과 그들의 웃음소리를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된다.
[글 이영근 사진 이영근, NARA 야외전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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