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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치제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며, 자치단체는 빈부귀천을 논하지 않고 사무인원을 공공으로 선출하며 경비도 공공으로 부담한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국민의 자치능력의 수준이 좌우한다. 정부가 민권을 확립한 후 공론을 존중하여 군수를 군민이, 관찰사를 도민이 선출할 것을 제안한다.
민주주의가 꽃피워졌던 구미선진국에서가 아니라 조선말엽 동학혁명이후 선각자들의 주창이다.
첫 글은 갑오개혁의 주역이었던 유길준이 1908년 지방자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한성부민회의 설립이유서이다.
다음 글은 1906년 대한매일신보가 사설을 통해 주장했던 내용이다. 대한매일신보는 우리나라 고대사에 등장하는 부족연합을 지방자치의 기원으로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공화제에 뒤지지 않는 자랑스러운 제도였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1941년 11월28일 상해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공포한다. 중앙정부는 건국 제 1기에 중앙에서 총선거한 의회에서 통과한 헌법에 의거하여 조직한 국무의회의 결의로 국무를 집행하는 전국적 최고행정기관이라고 규정했으며, ‘지방에는 도에 도 정부, 부·군·도(島)에 부·군·도(島)정부를 두고, 도에 도의회, 부·군·도(島)에 부·군·도(島)의회를 둔다’고 명시했다.
이미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지방정부‘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후 1946년 일본 헌법이 ’지방공공단체‘라고 한 것을 차용한 탓에 2년뒤 제헌헌법에서는 ’지방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로 바뀌게 된다.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자’고 지방자치를 외쳤던 선각자들과 건국의 아버지들께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2.
지금까지 중앙관료는 어떤 의미에서는 근면하고 우수했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가 경제 대국이 된 내막에는 관료의 힘이 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지자체나 우리 시민들도 관료들이 쓴 처방전에 따르기만 하고 맡겨 두면 되는 편리한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지방분권은 이 러한 나라의 체계를 뿌리까지 뒤흔드는 것으로서 막다른 지경에 이르면 중앙관료는 그렇다면 지자체 스스로 해보라고 내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방자치를 받아들이는 지자체의 현 상태는 어떠할까. 관료의 비호가 사라진 우리 마을의 관청이나 의회는 당황하여 잘못된 판단이나 정책을 펼지도 모른다. 지방분권으로 지자체의 대부분은 현 상태보다 나빠질 것이다. 의회나 의원의 이미지도 대체로 좋지 않다. 특히 우리들 주위에 있는 시·정·촌이나 구의회에서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연구하여 당파를 초월해 주민의 입장에 서서 행동하는 의원은 많지 않다. 지방분권은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예리한 칼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일본에서 지방분권이 본격적으로 주창될 무렵 이가라시 다카요시 호세이대 교수와 언론인 오가와 아키오가 ’지방분권과 일본의 의회‘라는 책에서 소개한 당시의 상황이다. 어떤가? 오늘의 한국상황과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일본은 이후 이러한 반대론과 저항 속에서도 강력한 지방분권정책을 통해 7대3의 지방자치를 6대4를 거쳐 5대5 수준으로 진전시켜왔다. 일본의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정책에 많은 문제점과 부정적 요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방분권법제정을 비롯한 일련의 맥락에 비추어 초기의 저항과 난제들을 극복해가며 우리보다 훨씬 더 진전된 자치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저들의 지방분권과정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결코 적지 않다 할 것이다.
이가라시 다카요시 등은 당시 지방분권 반대론자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정부와 의회는 그 국민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격언을 상기해보자. 우리들은 자신들의 시장이나 정장이 어떤 정책을,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언제까지, 어느 정도의 비용으로 시행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는가? 또 의회에 어떤 의원이 있고, 어떤 주장을 하며,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고 있는가? 선거를 하기는 했으나 친구의 권유 혹은 지역의 압력, 후원회로서의 의리, 심지어는 지명도나 외모, 혹은 연령이나 퍼포먼스로 선택했던 것은 아닌가? 그리고 기권하지는 않았던가? 정책적으로 혹은 도덕적인 면에서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는 의원이나 지방정부의 수장을 투표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었던가?
3.
지방의회가 부활한지 27년, 단체장 직선이 이뤄진지 23년째를 맞고 있지만 아직도 ’무늬만 지방자치’, ‘2할 자치’라는 자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역대 정권마다 지방분권을 약속하고 위원회를 가동해왔지만 성과는 기대이하였다는 것이 세평이다.
풀뿌리자치에서 출발한 서구민주주의와 영주제를 기반으로 국가가 형성되었던 일본 등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일찍이 우리의 건국아버지들이 주창해온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은 이제 미룰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국민적 기대감도 높고 대통령의 의지도 강하다.
전국 광역지자체와 기초지자체 단위에 자치분권협의회 조직도 갖춰져 추동력확보를 위한 연대도 가능해졌다.
더 이상 지방자치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것을 빌미삼아서는 안된다. 지방4단체도 집단이해에 따라 갈라져서는 안된다. 문재인정부의 자치분권위원회 역시 사뭇 달라야한다. ‘로드맵 수립’과 ‘시범실시’에 촌음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준비(Ready)가 아니라 행동(Action)이어야한다. 실행이 곧 착수라 하지 않았던가.
지방자치는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선인에게 불행하다.
1920년 사이토 마코토 일본총독이 3.1만세이후 독립운동 확산을 우려해 자문기구형태의 형식적 지방자치를 시행한 뒤 1년 만에 내놓은 담화문에서 한 말이다.
해방이 되어 민주공화국이 탄생한지 어언 70년을 넘어 세계 경제대국이 되고, 연륜만으로는 성인 지방자치를 맞고 있는 지금, 지방분권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며 민주주의의 기틀인 지방자치의 온전성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나라를 조선총독부령으로 식민지배했던 사이코 마코토의 망언을 어떻게 꾸짖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