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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정 이지함의 사전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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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6 10:00:38 작성자 : naver - ***
* 토정 이지함의 사전적 이해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형중(馨仲)이고, 호는 토정(土亭)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아버지는 치(穉, 1477~1530)이고,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판관 김맹권(金孟權)의 딸이다. 보령에서 태어나서 주로 이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뒤에 종실(宗室)인 이정랑(李呈琅)의 딸과 결혼하여 한때 처가인 충주 주변에 산 적도 있으며, 서울의 마포 강변에서 살기도 했다. 어려서는 형 지번(之蕃)에게 배웠으며, 나중에는 서경덕(徐敬德)의 제자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화기의 정국에서 과거를 포기하고, 전국을 유랑하며 많은 기행과 관련된 일화를 남겼다.

1573년(선조 6) 최영경·정인홍·조목·김천일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종6품직을 제수받았으며, 이듬해 포천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 어업과 광업의 이익을 국가경영에 활용할 것을 주장하고 다른 현에 소속된 어장과 염전을 임시로 포천현에 소속시켜 백성을 구휼토록 하자고 건의하는 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에 임명되어 걸인청(乞人廳)을 만드는 등 백성들의 구호에 힘썼으며, 과도한 군역 부담을 줄일 것을 건의하는 소를 올리기도 했다. 1713년(숙종 39)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지함의 일생에서는 서로 상반되는 듯한 두 면모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기인의 행적이며, 다른 하나는 다소 의외라고 생각되는 뛰어난 행정가의 자질이다. 이는 어느 정도 그의 가계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색 이래로 한산 이씨는 손꼽히는 명문가 중의 하나였다. 특히 이지함의 4대조인 이우(李堣)를 비롯한 3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그 이후로도 이지함의 선조들은 대대로 관직에 진출하여, 한산 이씨는 관료의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이 되었다. 포천과 아산 현감을 지낼 때 올린 소에서 보이는 이지함의 탁월한 현실 대응 능력은 이런 집안내력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지함이 마치 세상살이에는 전혀 뜻이 없는 것처럼 유랑하는 기인의 삶을 살았던 것 역시 그의 집안이 겪었던 몇 가지 일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의 가문이 누렸던 화려한 영광은 이지함 대에는 이미 조금씩 빛이 바래고 있었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겨우 지방의 수령에 머물렀다. 여기에 사화기의 어수선한 정국 동향은 정통 사림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한산 이씨 집안에까지 그 여파가 미쳤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종조부 파(坡)가 폐비 사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버지가 진도로 유배되고, 그의 형 지번은 윤원형에게 쫓겨나 단양의 구담(龜潭)에 은거하였다. 1548년 절친한 친구였던 안명세(安名世)가 을사사화 때의 일로 희생되기도 하였다. 1549년 종실로서 이지함의 장인이었던 이정랑이 역모에 연루되어 죽자, 그는 정치적 입신을 완전히 단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를 피하라[避知音說]」·「도잠의 귀거래사를 본떠」[次陶靖節歸去來辭] 등에서 이후 국외자로 자처했던 이지함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기인과 뛰어난 행정가라는 두 면모는 그러나 '도덕적 명분'을 한발짝 비껴 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관된 맥락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大人說」 참조) 성리학자들보다는 관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던 서인의 노선에 접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지함은 서인의 핵심 인물인 이이·성혼·송익필을 '우리 당'[吾黨]이라고 부르면서, 특히 이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국가적 위기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오직 이이가 조정을 맡는 것뿐이라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제자인 조헌은 이지함과 이이, 성혼 세 사람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과격한 언론을 통해 서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에 앞장선다. 뒤에 송시열이 이지함·이이·성혼·조헌 네 선생이 추구한 도는 하나라고 평가한 것도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이지함은 16세기 조선에서 화담학파와 율곡학파가 철학적 정치적으로 서로 접근하는 초기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지함 (조선 전기 수양론, 2004., 정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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