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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의 시골 농가에서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6.25 한국전쟁 당시 흥남에서 피난을 내려와 거제에 정착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의 가족은 부산 영도로 이사하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부산의 명문인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그가 경남중학교에 합격했을 때, 평소 과묵했던 아버지께서는 자랑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않고 교복을 맞춰주겠다며 그를 국제시장에 데리고 가셨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한 것이 많았지만, 그에게 가난은 오히려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또 어릴 적 가난했던 기억은 그대로 인생의 교훈이 되어, 불우하고 어려운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돕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부조리하고 불공정한사회에 대한 저항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요한 시국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참여하였다.
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문재인 대통령은 1975년 유신독재 반대 시위를 이끌다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강제 징집되어 특전사령부에 입대하였다.
1982년, 문재인 대통령은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마쳤지만, 유신반대 시위 전력이 결격 사유가 되어 판사 임용에 탈락하였다. 대형 법률사무소에서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는 것’이 변호사의 소임이라고 생각한 그는 결국 이런 제안을 마다하고 부산으로 돌아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그때 처음 맺어졌다.
처음부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은 학생운동 사건과 노동운동 사건들이 많았다. 그는 탄압에 시달리다 못해 자신을 찾아온 노동자들을 피하지 않았고, 그들의 말에 진정으로 공감하면서 최선을 다해 이들을 변론했다. 당시 학생회 활동을 했던 많은 학생들은 ‘그 당시 문재인 변호사의 얼굴을 지겹도록 보았다’고 기억한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치적 관심을 일깨워준 최초의 스승은 바로 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장삿길에서 돌아오실 때마다 책을 사다 주신 덕에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중・고등학교 6년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길렀다. 집에 이웃집 대학생이 찾아오면 아버지께서 사회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곤 하셨는데, 그때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과 식견들이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분석적 태도를 기르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2003년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인권변호사라는 말을 들으면서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만 했을 뿐, 국정운영 경험이나 행정경험이 없었던 그였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의 설득 끝에 민정수석 자리를 받아들였다.
1년여 동안 청와대 생활을 마치고 민정수석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네팔 히말라야를 여행하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접하고 곧장 귀국하여 탄핵대리인단 구성을 비롯하여 법적 대응 전반을 도맡았다. 탄핵재판 중에 있었던 탄핵반대 촛불시위 현장에도 참석하였다. 탄핵심판이 기각되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과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2009년 5월, 갑작스러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문재인 대통령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상주가 되어 서거 발표부터 장례 준비를 위한 회의주재까지 도맡았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구였고, 동지였으며, 정계 입문을 결심하게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이후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범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하였다. 2015년부터 2016년 1월까지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과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로 활동했다. 2016년 11월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 앞장섰으며,이게 나라냐라는 탄식과 함께 촛불을 든 국민들의 의사를 대변하고 이들과 시종일관 함께 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결정된 조기 대선에서 든든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여 41.1%의 지지율로 제 19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유례없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은 대한민국을 위해 다시 일어선 그는 이번에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 그는 직책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보다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대통령의 지위가 의미를 가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만약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세상을 바꾸는 것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없고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국민들과의 소통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제 19대 대한민국 대통령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제 19대 국회의원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혁신과 통합 상임대표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상임이사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
대통령비서실 실장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부산시교육청 행정심판위원
노동자를 위한 연대 공동대표
부산 YMCA 이사
법무법인 부산 대표변호사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노동자를 위한 연대 노동상담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 부이사장
한겨레신문 창간위원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법학과 강사
제 22회 사법시험 합격
경희대학교 법학과 졸업
경남고등학교 졸업
경남중학교 졸업
남항초등학교 졸업
제17회 백봉신사상
제16회 백봉신사상
문재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의 시골 농가에서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6.25 한국전쟁 당시 흥남에서 피난을 내려와 거제에 정착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의 가족은 부산 영도로 이사하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부산의 명문인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그가 경남중학교에 합격했을 때, 평소 과묵했던 아버지께서는 자랑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않고 교복을 맞춰주겠다며 그를 국제시장에 데리고 가셨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한 것이 많았지만, 그에게 가난은 오히려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또 어릴 적 가난했던 기억은 그대로 인생의 교훈이 되어, 불우하고 어려운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돕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부조리하고 불공정한사회에 대한 저항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요한 시국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참여하였다. 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문재인 대통령은 1975년 유신독재 반대 시위를 이끌다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강제 징집되어 특전사령부에 입대하였다.
1982년, 문재인 대통령은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마쳤지만, 유신반대 시위 전력이 결격 사유가 되어 판사 임용에 탈락하였다. 대형 법률사무소에서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는 것’이 변호사의 소임이라고 생각한 그는 결국 이런 제안을 마다하고 부산으로 돌아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그때 처음 맺어졌다.
처음부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은 학생운동 사건과 노동운동 사건들이 많았다. 그는 탄압에 시달리다 못해 자신을 찾아온 노동자들을 피하지 않았고, 그들의 말에 진정으로 공감하면서 최선을 다해 이들을 변론했다. 당시 학생회 활동을 했던 많은 학생들은 ‘그 당시 문재인 변호사의 얼굴을 지겹도록 보았다’고 기억한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치적 관심을 일깨워준 최초의 스승은 바로 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장삿길에서 돌아오실 때마다 책을 사다 주신 덕에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중・고등학교 6년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길렀다. 집에 이웃집 대학생이 찾아오면 아버지께서 사회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곤 하셨는데, 그때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과 식견들이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분석적 태도를 기르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2003년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인권변호사라는 말을 들으면서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만 했을 뿐, 국정운영 경험이나 행정경험이 없었던 그였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의 설득 끝에 민정수석 자리를 받아들였다.
1년여 동안 청와대 생활을 마치고 민정수석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네팔 히말라야를 여행하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접하고 곧장 귀국하여 탄핵대리인단 구성을 비롯하여 법적 대응 전반을 도맡았다. 탄핵재판 중에 있었던 탄핵반대 촛불시위 현장에도 참석하였다. 탄핵심판이 기각되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과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2009년 5월, 갑작스러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문재인 대통령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상주가 되어 서거 발표부터 장례 준비를 위한 회의주재까지 도맡았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구였고, 동지였으며, 정계 입문을 결심하게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이후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범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하였다. 2015년부터 2016년 1월까지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과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로 활동했다. 2016년 11월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 앞장섰으며,이게 나라냐라는 탄식과 함께 촛불을 든 국민들의 의사를 대변하고 이들과 시종일관 함께 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결정된 조기 대선에서 든든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여 41.1%의 지지율로 제 19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유례없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은 대한민국을 위해 다시 일어선 그는 이번에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 그는 직책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보다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대통령의 지위가 의미를 가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만약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세상을 바꾸는 것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없고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국민들과의 소통을 끊임없이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