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님께
저는 올해 38살 먹은 그리고 안정적인 직장보다는 일용직에서 더 많은 생활을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덕동 고실마을 휴먼시아 806동 301호에 사는 김수익이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 서른여덟인데... 지금껏 무엇을 하였기에 그 나이에 일용직에서 일하느냐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도 한때는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자로서 군대라는 테두리 안에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들으며 힘겨운 훈련과 새로운 경험의 연속선상에서 성취감도 얻으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갔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저 뿐만 아니라 주변의 누구나 여기만 나가면…….전역만 하면 나는 무엇이던 잘 할 자신 있다고 말했던것이 일반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삶이라는게 때로는 생각해본적 없는 이유 하에서 얘기치 못한 사건과 상황이 발생 할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이 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고 하여 저는 단 한번도 사회나 단체에 불만을 가지고 살아와 본 적이 없습니다.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다들 서민이라는 계층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일단 가정을 이루거나 성인이 되면 살아가기 빠듯하다는 이유 하에서 조금은 멀리 살아가는 것이 핵가족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이며, 통용되는 인식의 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 또한 국방의 의무를 다한 제 자신 그리고 사지가 멀쩡한 젊은 청년이 자기 몸뚱이 하나도 건사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남자는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결혼 적령기 20~30대에 잔병이라는 배우자와 한 가정을 이루며 몇 년을 살아왔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눈에는 젊은 사람이 왜 저렇게 사느냐는 주변의 시선이 처음에는 조금 따갑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지나온 그 시간은 저에게 살아온 환경이 다르면 보는 시각과 살아가는 사람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심어 주는 듯 하였습니다. 그렇게 서로 살아가기 빠듯한 사회속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의지만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이십대 중반부터 지금껏 면역이 떨어지면 쉬어야 되고 다시 움직일만하면 일하는 반복되는 그런 삶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각이 제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맞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원인도 찾고 살만한 요즘인데 과거의 시간에 이해가 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많아 이렇게 편지로 남겨드립니다.
이야기에 앞서 쩐이 목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록 돈 없고 인맥도 없는 대한민국 구성원중에 한명으로 살아가는 저에게 가장 어려웠을 때 저를 도와준 정부 정책에 항상 고마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받은 국비 지원이 어떤 사람들의 피와 땀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남자로서 자리를 잡아야 하는 젊은 날에 잔병치례를 자주하다보니 다른 사람보단 더디게 또는 조금은 늦게
다시 일용직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음식을 조금만 잘 못 먹어도 자꾸 장기 여러 곳에서 염증이 생기고, 위에 용종이 자라나라고, 대장에 악성 선종이 자라나고, 담낭에 조그마한 폴립이 커가고 통풍, 허벅지와 척추에 골감소증, 백혈구 수치 변동, 음식을 먹으면 혀가 굳어 간다는 것을 느끼다 보니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오다 보니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사회에서 낙오 되고, 다시 도전하고 낙오되고를 반복하며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저 혼자만이 살아간다면 모든 것이 제가 생각하거나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저는 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구성원중 한명이기에 그 모든 것이 저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하여도 저는 나쁘다는 생각을 하진 않습니다. 다들 그 정도는 아프다는 어떤 이의 말을 떠올려보면 이 글을 T쓰는 제가 너무 유별난 사람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2014년 말에 고용 노동부에서 실행하던 취약 계층 전액 국비지원이라는 취업 창업 프로그램에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고용지원센터 선생님과 많은 상담을 통하여 진로를 제과 제빵으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제과 기술 학원 선생님들과도 상담을 하여 2015년 3월부터 빛고을 제과 기술학원이라는 곳에 제과 제빵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 하여도 내일은 오늘 보단 더 나아질 거라는 꿈과 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저에게 남아있었습니다. 몇 달간의 과정을 통하여 자격증을 따고 취업을 하려 하는데 저희 제과 기능장 선생님들께서 저에게 물어 보셨습니다. 취업 하는 것 말고 또 다른 것... 하고 싶은 것 있냐? 혹시 꿈 같은 것 이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배워서 기능장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후 선생님들께서 저에게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아픈 사람은 일을 두 배로 해야된다 하셨습니다” 또 “ 기능장을 하려면 급여를 조금만 받고, 오랬동안 기능장이 운영하는 집에서 일을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급여는 최저 시급입니다. 오랜 시간 일을 하라는 것은 나쁜 말이 아닙니다. 좋은 선배님들을 만나서 오랜 시간동안 일하고 기술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제가 다니던 기능장 베이커리에서는
항상 “저 XX를 잡아줘야 한다는 것 입니다.” 제가 취업하여 일하러 가면……. 저는 분명히 처음 가는 곳인데 그 사업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저를 알고 있는 겁니다. 처음만나는 사람이 저보다 저를 더 잘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몸이 아프다 보니 정신이 피폐해져서 벽으로 흘러나오는 전자 기기기음과 환청이 들리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모여서
이러는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2018년 12월부터 2019년 3월까지의 환청 내용에 대하여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대통령님 이야기도 나오니 재미있게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등장 목소리부터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빛고을 제과 기술학원 원장님 목소리, 부원장님 목소리, 제과 기술학원에서 같이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 195 우리밀 사장님 목소리, 195 우리밀 직원들 목소리, 보성 파니피카 사장님 목소리, 스시도모도 사장님 목소리, 스시도모도 직원들 목소리, 생일도 - 굴전리 사람들 목소리, 할머니 목소리 다수, 할아버지 목소리 다수등등
<집에만 있으면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 기록으로 남겨드립니다.>
2018년 12월 광주광역시 월곡동에 있는 그랑팔레라는 베이커리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씻고 쉬고 있는데 제가 다녔던 제과 기술학원 원장 선생님과 부원장 선생님 그리고 같이 수업을 받았던 학생들 목소리, 빵집 사장님의 목소리, 할머니,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제 집에서 울려 퍼지듯이 들리는 겁니다. 내용 중에서 일부를 짤막짤막하고 간략하게 표현해 드리겠습니다.
“비로자나불 이라면서 우리가 죽여도 되잖아”
“째가 비로자나불이라면 우리가 사원이라도 하나 지어 주어야 되는 거 아니냐?”
밥 먹고 있으면 “앉아서 밥 먹고 있는 폼이 꼭 반가사유상 같네,”
”우리 수익이 아니었으면 우리 집안이 우세 할 뻔 했다. 우리가 수익이 한태 뭐라도 해줘야 되는거 아니냐?
“째 할아버지가 방첩대라면서, 정말 우리 수익이 할아버지가 방첩대 였어.?” 제가 완도군 생일면이라는 섬에 살 때 한달에 한번씩 라면과 짜장면 한박스씩 사오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올라가실 때에는 항상 휴게소에서 먹어야 된다면서 김치 한가지로 김밥 도시락을 싸가시던 김인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항상 그러셨습니다. 사람은 바르게 살아야한다. 그 분이 어떤 잘못을 하였기에 환청처럼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들로부터 제 방에서 방첩대, 방첩대하는 소리가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집안을 삼성보다 더 잘나가게 만들어주면 우리는 체육관에 모여서 XX도 할 수 있는데”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라던데……. 우리가 수익이를 여기서 나가게 만들어 버릴까”
“너희들이 나에게 했던 이야기 하고는 다르잖아……. 대한민국에서 가장 멍청하다면서”
“언니 여기서 나간 적 있어? 아니 나는 방송하느라고 여기서 나간 적없
아직 답변이 없습니다.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