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기회, 남북보건의료협력으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가동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2020-04-27
‘북한 핵문제보다 코로나19가 더 무섭고 위협적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코로나 사태가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고 있다. 북핵문제가 우리의 관심에서 잠시 멀어졌지만 해결을 미룰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4·27 판문점선언 2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가동을 위해 지난 2년을 복기해보고 돌파구를 찾아본다.
판문점선언은 정전협정에 기초한 ‘판문점체제’의 해체선언이자 남북관계 복원과 발전을 위한 기본합의서다. 무엇보다 남북관계 발전을 가로막았던 핵문제를 평화체제와 연계해 남북합의문에 담아 ‘평화-비핵협상’의 돌파구를 열었다는 점에서 판문점선언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92년 2월에 발효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이후 북한은 비핵화문제를 남북회담에서 의제로 다루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열린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이 연내에 종전을 선언하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3자 또는 4자회담을 개최하기로 했다. 판문점선언에서 남과 북이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함으로써 비핵화문제는 남북의제로 다시 들어왔다.
비핵화문제가 남북의제로 다뤄지게 된 것은 김정은 위원장이 우리 특사에게 밝힌,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조건부 비핵화론에 따른 것이다. 북한은 핵개발의 동기를 북미 적대관계에서 찾는다. 그래서 북미 적대관계가 해소되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펴면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등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보장 장치가 마련되면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내용을 판문점선언에 담은 것이다. 종전선언은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첫 발을 내딛는 일종의 정치선언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추진하려했던 것이다.
판문점선언의 평화체제 구축과 완전한 비핵화를 연계한 평화비핵협상의 합의 내용은 싱가포르 6·12 북미공동성명에서 재확인됐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먼저 평화비핵협상의 밑그림을 그리고 북미정상회담에서 이를 재확인함으로써 남북관계가 북미관계를 견인했다. 싱가포르 북미공동성명 이후 북미대화가 진척을 보지 못하자 9월평양공동선언을 통해서 북한이 영변핵시설을 영구 폐기하고, 미국이 종전선언, 연락사무소 설치, 제재완화 등의 상응조치를 교환하는 초기 이행로드맵을 남북합의 형식으로 미국에 제안했지만 미국이 수용하지 않았다. 미국이 영변 핵시설 영구폐기 이상의 비핵화 요구를 하고 완전한 비핵화 때까지 제재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해 하노이회담이 결렬된 것이다.
북한은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평화체제구축과 완전한 비핵화를 연계해 동시행동원칙에 따라 ‘평화-비핵 프로세스’를 추진하자는 입장인데 반해, 미국은 북한이 먼저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해야 ‘밝은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비핵화 초기단계에 제재를 풀어주면 완전한 비핵화 실현이 어렵다고 보는 것 같다.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평화체제 구축문제와 비핵화문제를 연계한 이행로드맵을 만들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합의도출에 실패하면서 북미관계와 남북관계 모두 교착국면에 빠졌다. 지난해 2월 말 2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과 10월 초 스톡홀름 북미 실무회담이 결렬되면서 판문점선언의 이행도 어려워졌다.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와 미국, 일본, 유럽연합 등 개별국가 차원의 제재가 지속되는 가운데 판문점선언의 남북협력 관련 합의추진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연계해 교환하고, 비핵화 진전에 따른 제재 완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9월평양공동선언의 남북합의를 무시하고 북한의 선 비핵화행동 조치를 요구하면서 ‘제재만능론’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반도 평화비핵 프로세스는 가동을 멈췄다. 북한은 지난해 말 제7기 5차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정면대결전’을 선언하고 ‘자력갱생 대진군’에 들어갔다. 북한은 미국이 셈법을 바꿀 때까지 핵무력 고도화를 추진하면서 장기전에 돌입했다.
하노이 노딜 이후 북한이 9월평양공동선언의 내용을 미국에 설득해 관철하지 못한 책임을 남측에 돌리고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역할하지 말고 민족의 이익을 내세운 ‘당사자’가 될 것을 요구하면서 남북관계 교착이 길어지고 있다. 판문점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북미관계에 종속돼 진전을 보지 못하자 연 초부터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는 행동 없이 오지 않는다”고 천명하고, 남북관계의 운신의 폭을 넓혀 독자적이고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
북미관계 교착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고, 코로나19사태라는 새로운 변수가 발생했기 때문에 우리가 운신의 폭을 넓혀 한반도 정세를 주도적으로 풀어 나가야 한다. 정부가 동해북부선(강릉-제진) 연결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은 판문점선언 합의이행의 의지를 확인한 것이다. 동해북부선 연결사업은 남북경협사업이자 남측의 고용창출을 위한 ‘한반도형 뉴딜’ 사업이기 때문에 서둘러 진행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사태를 계기로 전염병 예방을 위한 남북협력사업, 인도적 지원 등과 관련한 유엔의 대북제재 면제 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북한이 올해 주력사업으로 평양종합병원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코로나사태와 평양종합병원 건설을 계기로 남북 보건의료협력과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민간과 지자체 차원의 남북 보건의료 협력사업과 인도적 대북지원을 추진해 신뢰를 쌓고 이를 계기로 당국대화가 이뤄질 경우 비핵평화협상을 재개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남북 보건의료협력을 위한 인도적 품목에 대한 제재예외 적용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의 팬데믹에 따른 세계적인 공동대처라는 대의를 내세워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특사교환, 또는 정상회담을 조속히 개최해 남북관계 복원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핵은 적우가 분명한 문제이지만 코로나19는 적우가 따로 없는 인류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공동의 적이다. ‘K-방역’의 모범을 남북이 공유하면서 개성과 금강산 등에 세계보건의료에 기여할 남북협력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정상회담을 먼저 개최하여 남북관계 복원을 위한 큰 틀의 합의를 도출하고 각종 대화채널을 가동해 현안을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