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추진 역사가 주는 교훈
- 글: 김연철 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2018 남북정상회담 전문가 자문단)
정책브리핑
2018-03-30
남북관계의 역사는 정상회담의 역사다. 남북 정상회담은 지금까지 두 번 열렸다. 2000년과 2007년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정상회담을 추진한 역사는 길다. 남북관계에서 정상회담이 효과적인 대화 형식인 이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체제의 특성이다. 정책결정과정에서 지도자의 결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실무적인 접근보다는 정상차원의 만남이 중요하다.
4월 27일 판문점에서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논의했을 때는 1972년이다. 남북한은 특사를 교환하고, 7·4 남북공동성명을 채택했다. 당시 북한의 박성철 비서가 서울을 방문해서 정상회담을 제안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쉬운 문제부터 논의하자고 하면서 거부했다. 동서독이 1972년 두 번의 정상회담의 성과를 바탕으로 동서독 기본조약을 채택한 것과 비교해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1985년 전두환 정부 때 다시 한 번 정상회담이 추진됐다. 당시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전두환 정부는 사회주의권의 참여가 절실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개선이 필요했다. 1983년 아웅산 사태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부는 1984년 북한의 수해물자를 받고 1985년 분단이후 최초로 이산가족 방문이 이뤄졌다.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자연스럽게 정상회담 논의로 이어진다. 1985년 남북한은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구체적인 의제를 논의하기 위해 특사를 교환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부산의 청사포 앞바다에 북한의 간첩선이 들어오다 격침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1994년 김영삼 정부 때의 정상회담은 우연하게 찾아왔다. 북핵 위기 상황에서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서 극적으로 핵문제 해결에 합의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중재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실무회담이 열렸지만, 갑작스러운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곧바로 조문논쟁이 벌어지고 대북정책을 둘러싼 국내정치적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후퇴했다.
2000년과 2007년 두 번의 정상회담은 공통점이 있다. 두 번 모두 남북미 삼각관계가 선순환 할 때 이뤄졌다. 남북, 북미, 한미 세 개의 양자관계가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북핵문제라는 변수가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는 북미관계의 개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한미 양국은 공통의 대북정책을 공유하고, 긴밀하게 협력했다.
남북대화는 그동안 가다 서다를 되풀이해 왔지만, 의제 면에서 보면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통일 3원칙뿐만 아니라 체제인정, 민족적 연계의 회복, 이산가족 상봉, 민간교류의 활성화를 합의했다. 이후 1985년 경제회담을 거치면서 교류협력 분야는 진화했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구체화됐다. 특히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 부속합의서는 남북관계의 거의 모든 쟁점 등을 망라하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합의에서 실천으로 전환했다. 군사회담을 통해 군사적 신뢰구축을 발전시켰고,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을 사업을 시작했고, 이산가족 상봉을 정례화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력이 약화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후퇴했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은 판문점에서 열린다. 판문점은 널문리 주막의 중국어 표기로 한반도 분단의 상징이다. 1951년 허허벌판에 임시천막을 치고, 한국전쟁의 휴전을 위한 회담이 열린 장소다. 판문점은 과거 냉전시기 남북한의 특사가 오고간 장소이기도 하다. 판문점에서 열릴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와 남북관계의 발전의 전환점이 이뤄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