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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청와대가 위치한 지역은 옛날부터 풍수지리학상 길지(吉地)로 알려져 이곳에는 890년 전인 고려 시대에 남경의 이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이곳은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고종 5년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융문당, 융무당, 오운각 등의 건물이 들어서고 과거시험이나 무술대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또한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기 위해 왕이 손수 가꾸던 8배미의 논이 있던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1910년부터 경복궁을 조선총독부의 청사 건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후원에 있던 건물들을 다 허물고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했고, 총독관사를 새로 지어 7, 8, 9대 총독이 사용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여기에 관사를 지은 것은 조선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짓고 그 뒤편에는 총독관사를 지음으로써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지리학상 용맥을 끊어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이 나라를 영원히 지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보면 총독관사 건물은 大자의 모양을, 총독부 청사 건물은 日자의 모양을, 서울시청 건물은 本자의 모 양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 글자를 이으면 [大日本]이 됩니다.
그 후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곳은 미군정 사령부 하지 중장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무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가며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던 구청와 대 건물은 1993년 11월 철거되었습니다. 1989년에 집무실과 관사를 분리하면서 구청와대 본관을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 및 박물관으로 보존하자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의 자긍심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철거하게 된 것입니다. 철거 뒤 그 자리를 옛 모습대로 복구시킨 후 옛날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들이 있었다 하여 지금은 수궁터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구 본관을 철거하여 수궁(守宮)터로 복원
삼각산(三角山)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을 거쳐 경복궁(景福宮) 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이 산자락은 일찍이 명당(明堂)으로 알려져 고려 시대 (숙종 9년, 1104년) 왕실의 이궁이 자리잡았던 곳임.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景福宮) 후원으로 왕궁을 지키기 위한 수궁과, 경무대, 융문당, 경농재, 벽화실, 오운각 등 총 232간의 건물과 임금이 친히 논을 일궈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던 8배미의 논이 있었음.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알려졌던 이곳에 일제(日帝)는 1939년 7월 총독관사를 건립하여 우리의 면면한 민족정기 단절을 획책함으로써 이 건물은 경복궁내의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외세침탈의 상징이 됨.
총독관사는 해방 후 1948년 3월까지 미군정사령관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었으나 1990년 10월에는 관저를, 다음 해 9월에는 본관 건물을 새로 지어 옮김에 따라 빈집으로 남게 됨.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11월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되살리기 위해 구 총독부 관사 건물을 철거하도록 했고, 옛 지형대로 복원해 원래 이곳에 있던 건물의 명칭을 따라 수궁(守宮)터라 부르게 됨.